고려는 토호 귀족들의 혼맥으로 얽힌 일부다처(一夫多妻) 부계사회였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천민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잦아지면서 마구 늘어나는 그 소생들의 신분을 보장하기 어렵게 됐다. 적절한 도태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행된 게 종모법(從母法)이다. 아무리 지체 높은 아버지를 뒀어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식도 천민이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른바 '첩의 자식'에 대한 천시 풍조가 생겨나게 됐다.
조선 사회에서도 권세깨나 부리는 양반은 대개 여러 여자를 거느렸다. 하지만 그 중 한 명만 정식 부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싸잡아 '첩(妾)'이라 했다. 조선을 명색이 일부일처제 사회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부일처다첩(一夫一妻多妾)사회였다. 그리고 똑같이 한 남자의 아내일지라도 처와 첩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 신분 또한 엄격히 구별됐다.
첩의 자식을 일컬어 '서얼(庶孼)'이라 한다.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의 수필집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양첩(良妾), 즉 양가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서(庶)'라 했다. 서(庶)는 '여럿'을 뜻한다. 한마디로 덤이다. 또 천한 신분 출신인 천첩(賤妾)의 자식은 '얼(孼)'이라 했다.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바로 얼이다. 첩의 자식이라도 '서' 다르고 '얼' 달랐던 것이다.
비록 양반가의 성씨를 따르더라도 서얼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집안에서는 상속에서 소외됐고, 사회적으로는 관직 진출의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서얼 차별 정책은 1415(태종15)년, 서선(徐選)의 건의에 따라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는 규제가 최초로 성문화됐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확립됐다.
조선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이 법전에 따르면, 아버지가 2품 이상의 최고위층 양반이라 하더라도 양첩 태생은 정3품까지, 천첩 태생은 정5품까지로 벼슬길이 제한됐다. 물론 문과에는 응시조차 할 수 없고 잡과만 허용됐다. 그나마 '경국대전' 편찬 후에는 과거 응시 자체를 막아버렸다. 이처럼 서얼의 관직을 제한한 제도를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라 한다.
하지만 적서(嫡庶)차별에 대한 논란은 조선조 내내 끊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인재 활용 측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선두 주자는 중종 때 개혁가 조광조였다. 뒤를 이어 명종 대에는 서얼 출신 문인들이 직접 "양첩의 후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許)하라"고 요구했다. 또 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 명이 비슷한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서얼허통(庶孼許通) 운동은 번번이 유교적 명분론에 막혀버렸다.
그러던 1583(선조 16)년. 여진인 이탕개(尼湯介)와 그 무리가 변방을 침입해왔을 때,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이이(李珥)가 계책을 내놓았다. "자원해 육진(六鎭)에 나가 3년을 근무하는 사람은 서얼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공사(公私)의 천인(賤人)은 양민(良民)으로 면천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 세력의 반대로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불어 이이는 동인 세력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벗어 던지고 율곡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은 결국 서얼의 통용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쌀을 징수하거나 직접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게 했다. 역사적 상황이 서얼허통 운동의 작은 성과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물론 국난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서얼허통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명분론자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요컨대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던 17세기 후반에 명분론자 이보(李?)는 "명분이 안정되지 않음에 따라 민심도 안정되지 않으며,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넘보며,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상하분별이 없어서 예법을 행하지 못해 국가가 혼란하다"고 했다. 더불어 그 역사적 책임을 까마득한 선배 정치가 이이에게 돌렸다. "이이에 의해 서얼이 관직에 나가도록 허통된 이후로 신분의 분별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명분을 은폐함으로써 민심이 불안해지고 정치가 침체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서얼차별정책은 끊임없는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주자학의 '명분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여기에 봉건적 신분제도와 귀천 사상이 뿌리를 내림에 따라 조선시대 서얼은 가문 안이나 사회에서 극심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 이면에는 고상한 철학적 이념보다는, 권력 독점을 지켜내려는 양반 지배 집단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적 이념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가 앞서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