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설(說)로만 떠돌던 '박연차 리스트'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치권에서는 파장을 우려하는 한편 갖가지 뒷소문과 정치적 해석들이 돌고 있다.
◆정치권 "올 것이 왔다"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과 권경석 의원, 민주당 서갑원·이광재 의원 등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실명이 보도된 의원들은 19일 "돈을 받은 적이 없다"며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했다. 그 밖에 소문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언급조차 피했다.
그럼에도 "누구누구가 걸렸다더라"라는 말은 계속 번졌다. 한나라당의 PK(부산·경남)지역 한 의원은 "박 회장은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정치인에게도 '그냥 쓰시라'며 수백만~수천만원을 턱턱 던져줬다"며 "누가 걸릴지 알 수 없다. 70명이 연루됐다는 보도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정치권에서는 박연차 리스트가 3월 중에는 터질 것으로 예견돼 왔다. 의원들은 이날 "나돌던 리스트에 없던 ○의원은 왜 갑자기 들어간 거냐", "K의원과 다른 K의원, P의원 등은 왜 안 나오느냐"고 묻기도 했다.
◆떠도는 '음모론'
박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웠기 때문에 야당도 조심스럽다.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은 "검찰이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어떤 목적을 갖고 유출했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면서도 "공식 수사를 하지 않은 상황인데 대응할 필요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민주당은 '야당 죽이기 음모'를 우려하지만 여당에선 여당대로 이런저런 해석과 음모론이 나오고 있다. 여당 고위관계자는 "민주당 못지않게 한나라당 의원들도 많이 나올 것"이라며 "특히 PK지역은 친박(親朴) 중진 의원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당내 타격이 클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부에선 "여당 주류와 비주류 의원 비율을 맞추면서도, 친박에서는 거물급을, 친이(親李)에선 별 충격이 없는 전·현직 의원을 죽이는 수사가 기획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반면 "리스트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들 이름도 들어 있다"는 소문과 맞물려 "리스트 수사로 권력 핵심을 재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또 다른 음모론도 나온다.
◆청와대, 강한 의지(?)
관심은 이 대통령이 '박연차 리스트' 등 불법정치자금 수사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느냐로 모아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날 "우리와는 무관하다. 수사를 지켜볼 뿐"이라고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여의도 정치'에 부정적인 이 대통령의 성향상 이번 수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실제 여권 주류의 한 핵심 의원은 "얼마 전 이 대통령을 만나보니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의지가 강하더라"고 전했다. 이 의원은 "대통령은 정치권이 자기들 끼리끼리 부정한 돈을 주고받으며 권력을 주무르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며 "대통령과 관련된 인사가 드러나더라도 전부 수사해야 한다는 생각 같더라"고 했다.
하지만 당내 비주류는 이 대통령이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정(司正)의 칼로 야당도 치고 여당 내 비주류도 손보는 식의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내비치고 있다.
때를 맞춘 듯 여당 초재선 의원들이 이달부터 "정치권을 개혁해야 한다"고 들고 나온 것과도 연결지어 "대대적인 정치권 물갈이가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도는 등 여의도 정치권은 뒤숭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