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시 연무고등학교는 육군 논산훈련소에서 2km쯤 떨어진 한적한 농촌지역에 있다. 전교생 530여명인 이 학교 장래한(55) 영어 교사의 수업은 유별나다. 카세트로 팝송을 틀어주고 파워 포인트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의 필기시간을 줄여준다. 영어 필수 어휘 2000단어와 독해 지문을 CD로 만들기도 했다.
장 교사만 그런 게 아니다. 36명의 모든 교사들은 수업 계획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리고 학생들 선택을 받는다. 방과 후 8교시에 적용되는 이 수업은 학생들이 외면하면 폐강이 된다.
장 교사도 2006년 초 세 강좌를 개설했다 두개가 정원 미달로 사라진 뒤 확 달라졌다.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쭈뼛해졌다. 요즘 장 교사의 강의는 모두 정원 40명을 꽉꽉 채우고 있다. 학생들의 선택권이 '상향 평준화'를 만든 것이다.
연무고 학생들은 석달마다 한번씩 '30초 전쟁'을 치른다. 매분기 한번씩 인터넷을 통해 8교시 강좌 신청을 받는데 인기 있는 과목은 워낙 경쟁이 뜨거워 신청 개시 후 30초 안에 클릭을 못하면 강의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2006년 초 시작됐다. 정헌극 당시 교장의 주도로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학교 개혁에 나섰다. 석달에 한번 꼴로 교사들이 강좌 계획을 인터넷에 올리고, 학생들은 신청을 하게 했다. 학생이 선택하자 교사들 경쟁이 시작됐다. 모든 교사들이 학생들 눈높이에서 고민함으로써 상향 평준화를 이끈 것이다.
방과 후 수업발(發) 혁신은 정규 수업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이 학교는 학기 초마다 학생에게 어떤 수업을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하고, 학기 말에는 수업 만족도 조사도 벌인다.
이 학교 학습실에는 책상이 세 종류 있다. 의자에 앉는 일반 책상 외에 바닥에 앉는 책상, 서서 공부하는 책상이 더 있다. 수학과 황만준 교사는 "학생들 입장에서 고민해보니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 지루할 것 같아서…"라고 설명했다. 철저한 학생 중심의 시각이었다.
◆대치동 학원에서 배워온 선생님
최대성 교사의 '교사도 배우고 학생도 가르치는 국어 수업', 구재송 교사의 '미스터 구와 함께하는 직독직해 영어', 최상률 교사의 '숨통 트이는 체육'…. 학원가의 광고 문구가 아니다.
이 학교 교사들은 모두 자기만의 수업 브랜드를 갖고 있다. 학년 초 교육계획서를 작성할 때 교사들이 브랜드를 내걸고 작성해야 한다. 장주옥 교무부장은 "기업이나 사설 학원은 자기 브랜드제도를 도입해 효과를 보고 있는데 학교라고 왜 뒷짐 지고 있어야 하느냐"고 말했다.
교사들은 자기 수업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동료 교사들에게 평가를 받기도 한다. "1시간 수업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수업 분량을 조금 줄여라"(28년차 박정진 교사), "설명식 강의 비중이 너무 많고 수업 중 학생활동이 적어 아쉬웠다"(15년차 유삼종 교사)…. 지난해 6월 11일 국어과 박상문 교사(8년차)의 용비어천가 수업을 찍은 동영상엔 동료 국어과 교사들의 이런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국어과 전지동 교사는 2006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토요일 새벽마다 서울행 첫 고속버스를 탔다. 강남고속터미널에 내리면 지하철로 대치동으로 가 논술학원의 논술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들었다. 전 교사는 "당시 논술이 입시의 핵심으로 떠올라 우리가 배워서라도 아이들을 가르치자는 생각에 학원에 갔다"면서 "지하철 대치역 3번 출구로 나가 학원에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전 교사 외에 7명이 이런 식으로 토요일을 반납하고 자격증을 따냈고 '7인의 교사'는 '독(서)·토(론)·논(술) 우리땅'이란 동아리를 만들어 논술 교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제공했다.
교사들의 혁신은 학교의 변화로 이어졌다. 논산 인근 10개 중학교에서만 오던 신입생은 이제 22개 학교 출신으로 확대됐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멀리 장항에서도 온다. 대학 진학률은 95%가 넘는다. 작년엔 서울대 4명을 포함해 서울지역 대학에만 175명 중 56명이 입학했다.
삼형제를 모두 이 학교에 보낸 학부모 최경이(45)씨는 "논농사 짓는 형편에 학원 한번 못 보냈는데 큰아이는 서울대, 둘째는 한양대에 갔다"며 "선생님들이 밤 10시가 넘도록 남아 학생들 질문을 다 받아주었다. 부모보다 낫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권선옥 교장은 "처음엔 교원 평가 아니냐, 학원방식이다 등 내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학생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을 찾자는 데 동의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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