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전 늘 자장면에 빚을 진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반세기 외식문화의 꽃이자, 1992년 한·중 수교 전 양국 교류의 공백을 메워준 것이 자장면이었어요. 그런데 자장면을 다룬 연구논문 하나 없더군요. '내가 합당한 대접을 해주자' 싶었습니다."
서울대에서 중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양세욱(37) 한양대 연구교수. 갑골문을 해독하고 명·청대의 방언을 연구하던 이 젊은 학자가 최근 《짜장면뎐(傳)》(프로네시스)을 펴냈다. 19세기 말 화교들과 함께 한국에 상륙, 1950년대부터 한국의 외식문화를 점령해 온 자장면을 통해 한·중 음식문화와 교류의 역사를 풀어낸 것이다.
'합당한 대접'을 위해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자장면에 국적을 찾아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장면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식의 오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2003년부터 한국과 중국의 음식점 100여 곳을 찾아다니며, 그 수만큼의 자장면을 발굴해 맛을 봤다. "남의 영업비밀을 왜 캐느냐"는 문전박대 속에서도 꼼꼼히 조리법을 취재했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라 불리고, 주인 손맛과 손님 취향에 따라 색·맛·고명이 달랐다"고 했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우리처럼 자장면의 표준화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하루에 먹는 자장면은 600만 그릇 정도. 그 면발을 이으면 지구 한 바퀴 반을 돈다는 계산이 나온다.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시대가 도왔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에 들어와 있던 화교들은 돌아갈 곳을 잃었다. 그들은 대거 음식점을 열었고 '작장면'은 춘장에 캐러멜 시럽이 첨가돼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으로 표준화됐다.
1960~70년대는 자장면의 전성기였다. 한국정부가 분식 장려운동을 펼친데다, 후다닥 만들어 단무지 하나면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는 자장면의 편리함이 '빨리빨리'를 외치던 산업화 시대의 주문에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자장면은 한·중 교류의 가교이기도 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1992년 한·중 수교까지, 양국 교류가 단절됐던 40여년간 자장면은 한국이 중국을 추억하는 방식이었다. 동북공정 등으로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랭해지고 있는 지금 역시, 자장면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려면 서로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자장면처럼요. 작년 초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곳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이 좋아하는 한류 스타도 여러분의 음식인 자장면을 먹고 컸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죠. 젊은이들 사이에 혐한(嫌韓) 감정이 고개를 들던 때인데, 자장면으로 그걸 녹인 겁니다."
아쉽지만 자장면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우동·스파게티 등 다국적 국수류가 자장면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고, 배달 업계에서의 독점적 지위 역시 닭이나 피자에 내주고 있다.
"자장면은 그냥 음식이 아닙니다. 산업화의 '전투 식량'이자, 우리네 희로애락의 산증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음식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있기 어려울 겁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자장면에 따뜻한 박수라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