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에서는 언제 강도를 당할지 모르니 차에서 내릴 생각도 하지 마세요."
10년 전 뉴욕을 방문한 기자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무사 귀국'하려면 할렘가는 아예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시 할렘은 흑인 빈곤층 밀집지역으로, 마약과 범죄로 상징되는 슬럼가였다. 한국 관광객들이 길을 잃고 할렘가로 들어갔다가 강도를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그런 할렘은 이제 전설 같은 옛이야기가 됐다. 할렘은 뉴욕에서 가장 집값이 빠르게 치솟는 지역이며 다양한 쇼핑과 흑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할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할렘가가 천지개벽한 비결은 뭘까. 뉴욕시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범죄율이 낮아지면서 할렘의 밤거리도 안전이 보장됐다. 범죄의 온상이라는 이미지를 벗으면서 재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중산층의 이주가 늘고 있다. 또 다양한 쇼핑시설과 오피스도 들어서면서 경제적 활력도 넘쳐나고 있다.
물론 재즈와 힙합과 같은 흑인문화의 산실이며, 흑인 민권운동의 성지인 할렘의 급격한 변화에 저항하는 목소리도 높다. 원주민인 저소득층 흑인들이 재개발로 밀려나고 있어 할렘의 정체성(正體性)이 파괴된다는 것. 이 때문에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시위·소송 등 반대운동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한국과 같은 극렬한 저항과 물리적 충돌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규모 철거형 개발이 대부분인 한국과 달리, 뉴욕은 기존 건물들에 대한 개보수 위주이다 보니 사회적 갈등의 강도가 약하다. 또 철거형 개발을 하더라도 뉴욕시와 주민들이 참여하는 민관합동 비영리 법인들이 상당 부분 담당, 세입자들을 위한 각종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비영리 법인들은 세금 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받는 대신 저소득층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을 공급한다. 뉴욕시도 2013년까지 30억달러를 투자, 16만5000가구의 저소득층 주택을 짓기로 했다.
비영리 법인들의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뉴욕의 GMDC라는 비영리법인은 낡은 건물들을 사들여 저렴한 임대료로 중소제조업자들에게 영업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비영리 단체들은 낙후지역 학교에 자금을 지원, 우수교사를 유치하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갈등을 신속하게 처리해주기 위해 주택문제 전담 재판부(The Housing Court)가 설치돼 있으며 법률적 조언을 해주는 변호사 자원봉사제도도 활발하다.
이런 제도적 지원에다 재개발로 주거·교육 환경이 좋아지고 일자리도 많이 생기다 보니 저소득층도 마냥 반대만 하지는 않는다. 뉴욕도 50~60년대에는 한국과 같은 불도저형 전면 철거 위주였지만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거치면서 재개발 방식이 지금처럼 바뀌었다.
선진국도 재개발이 활발하지만 한국과 같은 극한 갈등을 빚는 곳이 많지 않은 근본 이유는 재개발의 목표와 철학의 차이일 것이다. 한국은 낡은 건물을 신속하게 헐고 아파트를 짓는 게 지상과제이다 보니 개발을 하는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밀어붙이기만 했다. 반면 선진국들은 목표를 낙후지역의 경제적 활력 회복과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두고 계획단계부터 자치단체·전문가·시민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개발 방식부터 고민한다. 우리가 왜 재개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용산참사와 같은 사회적 갈등은 계속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