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2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세계사이버대학 대강당에서 졸업식이 열렸다. 전동 휠체어에 앉은 박종일(39)씨가 학사모를 쓴 부인 송양미(43)씨를 보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여어-보, 추욱-하―해."
송씨는 아들(12)이 건넨 꽃다발을 안고 활짝 웃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여상 졸업하고 미용실 다니다 12년 전 결혼했어요. 몸이 불편한 남편을 챙기고 아이 키우느라 늦게 대학 공부를 시작했지요. 2~3주에 한번씩 몸져누울 만큼 고생했는데, 오늘 꿈이 이뤄졌네요."
◆30세 미용사 처녀와 26세 장애인 총각
송씨는 1985년 서울 성덕여상을 졸업한 뒤 금호동의 한 미용실에 취직했다. 10년 넘게 미용실에서 먹고 자며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독한 파마약을 만졌다.
1996년 봄 송씨는 건강이 나빠져서 수원 팔달문 근처에 사는 여동생(41) 집으로 쉬러 갔다. 근처 미용실에 다니면서 주말마다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거기서 남편 박씨를 만났다.
박씨는 뇌성마비 1급에 지적장애 2급이었다.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팔달문 근처에 좌판을 펴고 비누, 좀약, 옷걸이를 팔았다. 그는 아침마다 딸기 우유 하나를 송씨가 다니는 미용실 앞에 두고 갔다. 점심 때는 만두를 사왔다. 밤에는 영업이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송씨는 쌀쌀맞게 대했다.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박씨가 싫어 일부러 빨리 걸었다. 박씨가 송씨를 따라오다 휠체어째 넘어져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어느 가을 밤, 박씨가 분홍색 코스모스를 내밀었을 때 송씨가 폭발했다. "왜 자꾸 이러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다음 날부터 미용실 앞에는 딸기 우유가 없었다. 12월 어느 날, 박씨의 어머니(72)가 전화를 걸어 "아들이 앓아 누워서 '양미누나' '양미누나' 하고 헛소리를 한다"고 했다. 문병 온 송씨 앞에서 박씨는 아이처럼 울었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송씨는 "그 순간 이 사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저는 단칸 사글셋방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어요. 제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살았지요. 그런데 이 사람한테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죠."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돼라"
부부는 이듬해 1월 결혼했다. 송씨는 아이를 위해 남편을 공부시키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했다. 송씨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남편을 씻기고, 아침을 차렸다. 오전 10시에 과외교사가 오면 미용실 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3년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2000년 수원북중학교에 입학했다. 송씨는 학교 앞에 미용실을 얻었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기 힘든 남편은 외출증을 끊어서 미용실에서 볼일을 보고 가곤 했다.
"남편이 '애들이 괴롭혀서 학교 가기 싫다'고 울었어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돼라'고 했어요. 남편은 두말 없이 학교로 돌아갔어요."
아들이 "침 흘리는 아빠가 싫다"고 했을 때 송씨는 "아빠는 노력하는 사람이니 존경하라"고 야단쳤다. 2006년 2월 남편 박씨는 수원농생명과학고교를 졸업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돕고 싶어요"
이듬해 3월, 송씨는 미용실을 정리하고 '대학생'이 됐다. 전공은 사회복지학. 매달 장애인 수당과 기초생활수급비, 송씨가 미용 강의로 버는 돈 등 120만원으로 세 식구가 먹고살았다.
송씨는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사회복지사가 돼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