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강원도 춘천에서 주한 미국 대사관 주최로 '한국 영어 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참석자 한 명이 "우리 대학의 영어 교육은 전공과목 강의를 영어로 듣고 학술토론을 영어로 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세미나에 나온 영문학과 교수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객석에는 묵살당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37세의 영어학원장이 있었다. 그가 바로 '학교가 못 가르치는 살아있는 영어를 가르쳤다'고 자부하는 민영빈(78) YBM시사 회장이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김일성(金日成) 치하에서 러시아어도 잠시 배웠던 그는 1·4후퇴 때 남하해 당시 대구로 피란 가 있던 고려대 영문과에 편입해 영어를 익혔다.
민 회장은 국문과를 졸업한 형이 "사회에 나와보니 영어가 제일 중요하더라"고 한 말을 듣고 무조건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부턴 영어가 공부·생활·사업의 중심이 됐다. 영자신문 '코리아 리퍼블릭(현 코리아 헤럴드)' 기자이면서 대학강사로도 일했다.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4·19 때 당시 한국상황을 보도한 외신(外信)을 모아 '4월의 영웅들'이라는 책도 냈다. 1961년엔 시사영어사를 인수했다.
YBM시사의 전신(前身)인 시사영어사가 탄생한 지 50년, 민 회장이 인수한 지 4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세월은 한마디로 그가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영어'를 가르친 기간이다. 인수 당시 연 매출 1000만원이던 YBM시사의 매출액은 연 48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익히는 학생 수가 1년에만 100만명이다.
이른바 '실전 영어'를 가르친 그는 지금 한국 영어교육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지난 13일 집무실을 찾았을 때 민 회장은 여든을 앞뒀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력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1968년에 영어교육 목표가 실용 영어로 바뀌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되면 자가용도 타고 해외여행도 다녀요. 그때부턴 영어를 배울 땐 말하기와 쓰기도 해야 한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는 거예요. 몇백달러 때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거지요. 저만 심각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만일 그때 확 바꿨으면 70년대 이후 우리가 영어 하나만은 확실하게 잘 했겠죠. 학교에서 영어 교육이 어느 정도 완성됐을 수도 있었겠죠."
―저는 1980년대에 중·고교를 다녔는데 말하기와 쓰기는 거의 배우지 않았습니다.
"문법 책으로 배우다가 망했겠지요. 우리 회사에 전에 있던 편집부장이 '고추보집물'이 뭔지 아느냐고 묻더라고요. 유명한 문법 책 첫 장에 나오는 명사의 종류래요. 고유명사, 추상명사, 보통명사, 집합명사, 물질명사의 앞 자를 말하는 거죠. 일제시대 때 쓰던 표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겁니다."
―회장님은 그렇게 안 배우셨나요?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란 가서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제가 운이 좋았어요. 개성에 있는 송도중학교에서 가르치시던 김연우 선생님에게 배웠어요. 그분은 소리 내어 읽고 해석하고 쓰고 듣고 말하기를 다 하라고 하셨어요. '집에 가서 크게 읽어. 외울 때까지 읽어. 외워졌으면 책 덮고 해봐. 외워졌으면 써' 이렇게요."
―그 당시에 이미 '살아있는 영어'를 공부하신 건가요?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깨어 있었던 분이시죠. 당시 대구 YMCA에서 강의했던 양주동 선생님한테도 배웠어요. 그분은 천재입니다. 영어 강의하면서 한시(漢詩)를 읽어줘요. 프랑스어도 하시죠. 40분을 강의하면 20분은 자기 자랑을 하는데 10분 동안 핵심을 짚어요. 예를 들면, '목적 보어·주격 보어, 이런 거 외우지 말고 문장을 외워라' 이런 거죠. 참 만나기 힘든 분들이죠."
―영어와 관련해서 시도하신 사업이 많이 성공했죠?
"살아있는 영어와 관련해서 제가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어요. 'ENGLISH 900'이라는 책을 카세트 테이프와 함께 냈죠. 미국 ELS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1983년 처음으로 맺었어요. 이때 저희가 외국인 영어 선생님 7명을 데려왔습니다. 정식 비자를 받고요. 지금 저희 회사에 외국인 강사가 600명쯤 돼요. 학생들을 해외로 연수 보내는 프로그램도 제가 처음 시작했습니다. 토익(TOEIC)도 들여왔죠."
―이명박 정부가 취임 초 '한국형 토플'같은 시험을 개발해서 영어시험을 보고 '합격·불합격'만 수능에 반영하겠다고 했었죠. 사대나 교대 출신이 아닌 영어 전문 교사도 뽑고요. 실제로 실행된 건 별로 없지만요.
"교사 자격증이 없더라도 영어를 잘하면 잘 가르칠 수 있다고 봐야죠."
―이른바 '한국형 토플'을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할 수도 있고 미국에 가서 주문하면 해줍니다. 일본 통산성이 1977년에 미국의 ETS(교육평가원)에 의뢰해서 만든 시험이 바로 '토익'이에요."
―조기 유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돈이 없는데도 무리하게 가면 안되죠. 그건 곤란합니다. 지금은 외국에 가는 것보다는 못해도 여기서도 잘할 수 있는 방법이 많잖아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가자, 가지 말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조기 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동안에 우리 정치인들이 뭘 했느냐는 겁니다. 뭔가 잘못돼 있으니까 그랬겠죠."
민 회장이 영어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영어는 로마 시대의 라틴어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다. 이런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해서 국제사회를 상대로 장사를 잘해야 한다. 그가 2004년 쓴 책의 제목도 그래서 '영어 강국 KOREA를 키운 3·8 따라지'다. '따라지'는 해방과 6·25 전쟁 때 남쪽으로 와서 정착한 북한 출신을 뜻하는 말이다. 38선의 38이라는 숫자는 '섰다'라는 화투 게임에서 가장 낮은 패를 의미한다. 처지가 나쁜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북 출신들 사이에선 "바닥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다"라는 의미를 담은, 일종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단어로도 쓰인다.
―'따라지'라는 말을 쓰신 이유가 있나요?
"왜 그런 표현을 썼느냐고 질책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속된 느낌이 나는 모양입니다. 저는 '뭐가 어드래서 그래?'라고 했지요.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뭔가는 있죠."
―피란은 가족이 모두 나오셨나요?
"아버지 어머니 제가 황해도 신천에서 살다가 왔죠. 서울대 국문과를 다니고 교사를 하던 형님은 북한군에 납치됐고요. 북에 살 때는 아버지가 한때 면장을 하실 정도의 형편은 됐어요.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누구나 똑같죠. 어머니가 대구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했어요. 누구나 어렵고 힘들고 그럴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때도 길거리에서 공부했어요. 교육열 하나만큼은 대단했어요."
―탈북자를 도우신다고요.
"탈북자 800여명에게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줬어요.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가르쳐줬습니다. 잘하는 이는 그리 많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욕심을 너무 많이 내더라고요."
―남한 학생이나 북한 학생이나 영어가 어려운 건 똑같은가 봅니다.
"열심히 하기 힘든 게 똑같은 거겠죠. 강의할 때 보면 어떻게 하면 영어를 쉽게 배우느냐고 묻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런 건 없습니다. 쉽게 하려고 하면 답이 없어요. 열심히 하려고 하면 그 방법을 알려줄 수는 있죠."
―고향 생각 많이 나시죠?
"아련하지요. 김일성 치하에서 반(反)김일성 무장봉기가 한번 났답니다. 그게 제 고향인 황해도 신천이래요. 김일성이 억울해서 제가 나온 소학교 자리에 박물관을 세웠다고 들었어요."
―지금 젊은 세대 중엔 통일에 대해 회장님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친북파는 아니죠?"
―네?
"통일될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나 북한 출신인데 통일은 꼭 돼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김일성이 죽은 뒤에 통일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순진했죠. 이젠 '잘못하면 이 상태가 손주 때까지 가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북한과 협력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솔직히 그런 시각은 기분 나빠요. 뭘 알고나 얘기하는 건지. 통일에 대해서는 일단 나 같은 사람부터 할 말이 있는 거예요. 북한 정권이 정말 협력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통일이 됐겠지요."
―북에 찾고 싶은 분은 없나요?
"친척들이 있죠. 그러나 찾으려고 시도해본 적은 없고, 주변에 계신 분들을 도와주기는 했습니다. 제 주변에 가족과 인사도 못하고 남쪽으로 온 분이 있어요. 나이가 저보다 10년 위인데, 죽기 전에 북에 있는 가족에게 살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도와줬어요. 탈북자를 돕는 단체에 갔더니 1주일 만에 연락이 왔어요. 부인과 아들 둘이 다 살아 있다는 겁니다. 중국에서 만났는데 헤어질 때 8살짜리 아들이 예순 넷이 됐는데도 금방 알아봤대요. 처는 남편이 살아 있다는 얘기 듣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답니다. 가슴 아픈 얘기죠. 저도 보고 싶은 분들이 있죠. 만약 만난다면 저도 그렇게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민 회장의 사업은 영어교재 출판이 매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학원과 토익 등을 통한 매출이다. 그는 지금까지 8200여종의 서적을 출판했다. 일본과 중국 등 6개국에 책 400여종에 대한 저작권을 수출했다. 성인학원과 어린이 학원을 합쳐 전국에 140여개 학원이 있다. 월 기준으로 약 10만명, 연 기준으로 약 100만명이 YBM 학원을 다닌다.
재미있는 것은 영어와 학원 사업 이외의 분야를 시도해본 일도 많았다는 점이다. 1990년에는 '코리아 데일리'라는 영자신문을 만들었다가 9개월 만에 접었고, 상호신용금고를 하다가 고스란히 날린 적도 있다.
―스스로가 사업가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교육자라고 생각하세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죠. 학자도 아니고 사업가로서도 대단하지 않고 신문기자로서도 그저 그랬던 거 아닌가요. 신문사에 다닐 때도 계속할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대학교수를 해서 대단한 학자가 될 것 같지도 않았어요. 외교관이 될 기회가 있었는데 영어를 좀 할 뿐 외교관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어요. 그러나 영어 잡지는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것이지요. 다른 거 할 줄 모르니까 이거라도 잘해야죠."
―후회되시는 일은 없으세요?
"돈을 좀 더 많이 벌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언제나 합니다. 돈 벌 기회가 많았는데 놓친 것도 많고요."
―돈이 더 많으면 뭘 하고 싶으십니까.
"교회 관계자들도 좀 도와 줬어요. 요즘 유명한 기독교계의 어떤 분은 제가 '80평생 살아 보니 제일 힘든 건 돈 버는 거였습니다' 이러니까 웃더라고요. 돈이라는 게 그래요. 줄 때 기쁨이 돈 받을 때보다 훨씬 큽니다. 수익이 있으면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기부를 많이 하셨어요?
"20년 동안 한 450억원 정도 했습니다. 250억원은 제가 세운 성남의 한국외국인학교(KIS)에 갔어요. 나머지 200억원 중 100억은 국내외의 대학에 기부했고요. 모교인 고대에도 냈습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어요. 예를 들면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한국학 과정이 있었어요. 이게 20년 만에 없어질 뻔했죠. 재일동포가 낸 돈으로 운영됐는데 지원이 끊긴 거죠. 제가 2006년에 국제교류재단과 15억원씩 내서 살렸어요. 하버드대학의 한국학연구소에 150만달러(당시 20억원)를 내서 출판기금을 만들었죠.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UBC)에 '한국문학 및 문학 번역 교수직'도 만들었습니다."
―그게 어떤 교수직인가요?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雪國)'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사이덴스티커라는 걸출한 미국인 번역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사이덴스티커는 일본에 오래 산 사람이었어요. 우리도 그런 번역가를 키우기 위해 1996년부터 외국인이나 교포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이 장학금을 받은 브루스 풀턴 교수가 UBC에 가서 학과를 개설하기 위해 125만 캐나다 달러(당시 약 10억원)를 요청하기에 제가 기부를 해서 그 과가 생긴 겁니다."
―학교 운영을 하셨어도 잘하셨을 거 같은데요.
"그건 안 했습니다. 간섭을 받잖아요. 그래서 간섭을 안 받는 외국인학교를 설립했던 겁니다. 분당에서 고등학교를 해보려고 했었어요. 교육 당국에 있는 친구가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교사노조도 있고 복잡하다고요. 만약 고향에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간섭을 받기는 싫었습니다."
―최근에 학교를 팔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다고 하던데요.
"그런 요청이 많이 옵니다. 대학도 오고, 고등학교도 많이 오고요. 대안학교에서도 왔어요. 대안학교도 커지면 정부가 간섭한대요. 그래서 안 한다고 했어요."
―학원업에 대해서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죠.
"학원에 대해 안 좋은 시각이 있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학원이 없었으면 국민 교육이 가능했겠습니까.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한 고등학교 교감이 '내가 평생 영어선생을 했는데 미국 사람과 악수를 처음 해본다'고 그래요. 당시 교사들을 미국에 연수를 보냈는데 연락이 왔어요. 영어 교사들이 정말 맞느냐고요. 오후 5시에 모이라고 했는데 못 알아들어서 한 명도 안 왔다는 겁니다. 요즘은 교사 중 70%는 영어회화를 할 겁니다."
민 회장은 인터뷰 내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말투도 자세만큼이나 당당했다. "출판업은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의 어린이 대상 학원이 좀 비싼 것은 사실인데, 다른 곳에서 베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는 철저하게 사업가였다. "정부가 교육에 너무 간섭한다", "과연 대학에 자율을 주겠느냐"라고 말할 때는 교육자였다.
살아 있는 영어교육에 대한 그의 신념은 강렬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소통 위주의 영어교육으로 바꾸겠다고 했었죠. 많이 두들겨 맞을 겁니다. 그래도 해야죠. 그게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