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충무로의 서울문화인쇄소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종이박스 50여개가 어른 키만큼 쌓여 있었다. 박스를 열자 검정 교무수첩 1200권, 출석부 2000권, 학급일지 1000권이 빼곡히 차 있었다. 이 업체 박세진(33) 관리실장은 "새 학기를 앞두고 교무수첩·출석부·학급일지 '3종 세트'를 미리 찍어놨는데, 불황으로 일선 학교 단체 주문이 뚝 끊겼다"고 했다.
서울 중구 충무로 일대에 그늘이 짙다. 충무로는 서울에서 영업 중인 인쇄소 8000여개 중 절반이 몰린 곳이다(대한인쇄협회 통계). 연세대 사회학과 한준 교수는 "인쇄물은 정부기관부터 자영업자까지 모두가 손쉽게 이용하는 홍보 수단"이라며 "인쇄물시장은 '2009년 2월 대한민국'의 경기와 세태(世態)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본지가 충무로 일대에서 인쇄기가 가장 많은 업체 10곳을 돌아봤다. 인쇄업자들은 "아파트 광고와 나이트클럽 전단은 주문이 줄고 학원 전단·대형 마트 할인 쿠폰·사채업자 명함·여성 화장품 광고는 늘었다"고 했다.
◆반 토막난 아파트 광고
14일 오후 대하인쇄 작업장은 한산했다. 이 업체는 아파트 광고가 매출의 30%를 차지한다. 이영수(45) 사장은 "작년까지는 아파트 분양 광고물을 한 해 30만장 찍었는데 요즘은 주문이 거의 없다"고 했다. D건설 직원은 "부동산시장이 안 좋아서 홍보물을 돌려 봤자 분양이 안 된다" 고 했다.
나이트클럽 전단지도 사라졌다. 이 업체에서 400m쯤 떨어진 다른 인쇄소에는 '무한 부킹' '연예인 총출동'이라고 적힌 전단 서너장이 뒹굴고 있었다. 이 업체 직원은 "6개월 전만 해도 전체 인쇄물 중 20%가 나이트클럽 전단이었는데 요즘은 아예 주문이 없다"고 했다.
◆예산 아끼려 종이 보고서 안 찍어
정부와 대학도 인쇄물 주문을 줄였다. 상지피엔아이 인쇄소는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정부 보고서, 학회 논문집, 대학 홍보물 주문이 올 들어 '반 토막'났다. 이 업체 유창원(46) 부장은 "작년 초에는 정부기관이 워크숍 한번 할 때마다 보고서를 100권 넘게 찍었는데 올해는 주문이 없다"고 했다. 거래처 공무원은 "예산 절감을 위해 앞으로 보고서는 이메일로 주고 받기로 했다"고 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직원은 "옛날에는 학회를 열 때 으레 인쇄소에서 논문집을 뽑았는데, 요즘은 직접 만든 복사본을 돌린다"고 말했다.
◆사채업자 명함·학원 광고·할인쿠폰·화장품 광고 늘어
반면 '일수' '대출' 같은 글귀가 찍힌 사채업체 명함 주문은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인쇄업자들은 "전체적으로는 인쇄물 주문량이 작년보다 30~40% 줄었지만 사채업체 명함만은 두배쯤 늘었다"고 했다.
대형마트 할인쿠폰과 학원·학습지 광고물도 늘었다. 14일 오후 5시쯤 충무로의 성진애드컴 인쇄소 작업장 입구에는 택배차량과 퀵서비스 오토바이 10여대가 뒤엉켜 있었다. 막 인쇄된 학원 전단을 싣고 가기 위해서였다. 이 업체 직원은 "작년 이맘때는 학원·학습지 광고물을 하루 140만장 찍었는데 요즘은 200만장 찍는다"고 했다. 같은 시각 혜인기획 인쇄소에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할인쿠폰이 2m 높이로 쌓여 있었다. 류명식(57) 사장은 "작년에는 하루 평균 10만장씩 할인쿠폰을 찍었는데, 지금은 26만장 찍는다"고 했다.
여성 화장품 광고물도 증가세였다. 한 인쇄업소 직원은 "하루 평균 4만장씩 화장품 광고물을 인쇄하고 있다"며 "작년보다 1만~2만장 늘어난 물량"이라고 했다. 이곳 단골인 A화장품 직원은 "2008년 매출이 전년보다 13% 늘었고, 올해도 9% 이상 증가할 전망"이라고 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여성들이 호황일 때는 핸드백이나 의류를 구입하다가 불황일 때는 상대적으로 값이 싼 화장품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