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 또 한곳 문을 닫았다. 경기도 용인 동백고등학교 맞은편 빌딩 2개 동에는 2007년만 해도 국·영·수·논술학원이 6개나 있었지만, 지금은 영·수 전문학원 2곳과 논술학원 1개만 남아 있다. 학교 바로 옆이라 학원들이 잘 될 법도 하지만, 동백고 주변에는 아직 성공한 대학입시 학원이 없다.

그렇다고 동백고가 이름난 명문고도 아니다. 이 학교는 2007년 개교한 신생 학교다. 비평준화 지역인 동백고의 개교 당시 커트라인은 중학교 내신 200점 만점에 94점이었다. 인근 실업계 고교의 커트라인도 100점 이하는 드물었다. 2007년 1차 지원에는 모집인원(358명)에 미달하는 297명만이 지원했다. 사실상 '아무나 들어오는 학교'가 2년 만에 '학원을 몰아내는 학교'가 된 것이다.

동백고 김재흠 교장(학생들 사이 오른쪽)과 양영평 교감의 2007년 부임 첫해는 심각했다. ‘문제학교’에서‘학원보다 나은 학교’로 탈바꿈한 것은 기존 학교가 외면하던‘하위권 25%’에 집중한 결과였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기가 질린 초보 교장·교감

2007년 3월 부임한 김재흠 교장과 양영평 교감은 동백고에서 처음 교장·교감을 맡게 된 '초보'였다. 두 사람은 "첫 부임지니 열심히 하자"고 의기투합했지만, 학생들의 중학교 내신 성적을 보고는 입이 벌어졌다. 200점 만점에 평균 135점. 네명 중 한명꼴로 다른 인문계 고교에는 입학하기 힘든 120점 이하 성적이었다.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문제 학생'들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서로 주먹질과 힘겨루기를 해댔고,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학생이 담배를 피운다" "노상방뇨한다"는 민원 전화가 걸려왔다. 교무실로 불려온 학생들은 교사에게 빈정거리거나 욕설을 내뱉었고, 나무라는 교사를 폭행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김 교장과 양 교감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대책을 논의했다. 두 사람은 우선 "교육의 목적을 학생 실력에 두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격주로 토요일 일과시간이 끝날 때마다 전체 교사 회의를 열어 2시간씩 학교 운영 방식에 대해 토론했다. 김 교장은 담임 교사들과 진지하게 얘기하는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마침내 결론이 내려졌다.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 힘든 성적이었던 하위권 25%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교사들은 중학교 과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하위권 학생용 보충자료'를 만들었다. "서울대를 몇명 보냈냐"는 게 중요한 고교에서 상위권을 위한 심화학습 자료는 있어도 하위권을 위한 보충자료는 흔치 않았다.

교사들은 한달 동안 중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서 문자 식의 사칙연산이나 기본 회화 표현 등 고등학교 교육에 꼭 필요한 내용들을 따로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책의 제목은 인기그룹의 이름을 본떠 '동백신기'라고 지었다. 하위권 학생들은 "유치하다"고 웃으면서도 자신들을 위한 맞춤 교재인 '동백신기'를 들고 다녔다.

하위권 아이들의 변신

2학기가 시작되면서 김 교장과 양 교감은 국·영·수 수준별 이동식 수업 '3+1'을 도입했다. '3+1'이란 학생들을 상·중·하로 나눈 뒤, 최하위권 학생들만을 따로 떼내어 별도의 반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관용반'이라고 이름 붙여진 최하위권 학생들은 교실에 18명씩 모여 밀도 있는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동안에도 '관용반' 학생들은 공짜로 특별 보충 수업을 받았고, '관용반' 학생들이 참가하는 야간 자율학습 교실에는 교사 1명이 함께 하면서 졸지 않고 집중하도록 도와줬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3 때는 학교 끝나면 거짓말하고 PC방으로 달려갔다"던 1학년 이장균(16)군은 스스로 야간자율학습에 지원했다. 이군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랑 수업 들을 때는 '쪽 팔려서' 이해가 안 가도 질문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비슷한 친구들과 수업을 들으니 질문하기 쉽다"며 "진단평가에서도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자랑했다.

1년에 네번 치르는 학업성취도평가 결과에서도 이 학교의 성과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학교가 집중적으로 공을 들였던 최하위권인 8·9등급 학생의 비율이 줄어들었다. 수학 과목의 8·9 등급 학생 비율은 지난해 3월 13.0%에서 11월엔 8.6%로 줄었고, 영어 과목의 8·9 등급 학생 비율은 13.2%에서 6.3%로 내려갔다.

대신 최상위권인 1등급 학생 비율은 수학이 1.6%에서 2.9%로, 영어가 2.7%에서 3.4%로 늘어났다. 하위권 학생들이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중상위권 학생들 성적도 함께 상승한 것이다.

하위권 아이들이 자신감을 찾자 학교 분위기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학생들 간 폭력도 줄어들었고, 흡연율도 절반 이상 낮아졌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친해졌다.

학생들도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신입생 선발에서는 개교 이래 처음으로 1차 지원에서 경쟁률 미달을 벗어나 1.1 대의 1이라는 경쟁률을 기록했다. 신입생들의 평균 내신성적도 2007년 137점에서 올해는 157점으로 올라갔다.

동백고등학교는 올 연말에 1회 학생들이 처음으로 대학입시에 뛰어든다. 양 교감은 1회 학생들의 3학년 진학을 앞두고 매일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다. 다음 주에는 학생들에게 모의 대학원서 접수를 시켜 대학 입시의 살벌함을 간접 체험시킬 계획이다.

"3년 농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 느낌이에요. 결과요? 학생들을 믿는 수밖에요."

가요계엔 '동방신기' 동백高엔 '동백신기'

'선생님표 맞춤 교재' 인기


동백고 교사들이 만든 중하위권 학생용 맞춤형 교재. 기초가 약해 수업을 못 따라오는 학생들을 위해 교과 담당 교사들이 중학교 교과서 등을 들춰가면서 영어와 수학의 기초 부분을 집중적으로 풀이했다. 제목은 청소년에게 인기 있는 그룹 '동방신기'를 패러디해 '동백신기'라고 붙였다. 성실은 중위권, 관용은 하위권 학생을 위한 교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