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훈이 그 탄피를 받아 살피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본군이 맞구나. 그런데 감사(監司)의 편지에는 해주 성안에 영목(鈴木) 부대 마흔 명밖에 없다고 했는데, 누가 성을 에워싸고 있던 이만 가까운 동비들을 쫓고 여기까지 와서 그들을 잡아 죽였다는 말인가?"
"가까운 일본군 병참부대나 수비대(청일전쟁 수행을 위해 황해도 각처에 주둔했음)에서 구원을 나온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자기 구역을 지키기에도 바쁘다. 해주를 지키는 영목 소위의 부대도 멀리 용산에서 올라온 병력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몇 명 안 되는 지역 병참부대나 수비대에서 구원을 나온단 말인가?"
안태훈이 그렇게 말하고 장정을 보내 진상을 들려줄 만한 마을 사람 하나를 찾아오게 했다. 그 사이에도 중근은 마비와 몽환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흐릿한 의식으로 나무에 묶인 채 총살당한 다섯 구의 동학군 시체를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괴롭게 일그러진 채 굳어있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이상하게도 낯익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청계동에 농막(農幕)살이 하는 김 서방 이 서방 같기도 하고, 물지게꾼 박노미며 장작머슴 윤 총각 같기도 했다. 봇짐장수 칠성이 등짐장수 점백이였고, 강 포수 정 포수를 닮기도 했다.
중근은 그때까지 여러 명의 동학군을 총포로 쓰러뜨렸지만, 그들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개화파인 아버지 안태훈에게서 주입받은 대로 중근에게는 동학군이 '미련하고 완악한 역적의 무리'로서 용기와 총 솜씨를 아울러 뽐낼 수 있는 추상적인 표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죽은 그들을 가까이서 보니, 이 땅 어디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순박한 민초들일 뿐이라는 게 몹시 충격적이었다.
'이들이 왜 여기 와서 죽어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죽어야 했는가…….'
중근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동학군의 시체들을 망연히 살피고 있는데, 다시 귀청을 찔러오는 소리가 있었다.
"점심 때 수주끼(鈴木:스즈키)란 일본 장수가 불시에 닥쳐 동학군을 찾다가 근처 산속에 숨어있던 저들을 잡아 포살한 것입니다."
마을에서 불려온 중늙은이가 벌벌 떨며 안태훈에게 일러주는 말이었다.
'그들이 왜 이들을…… 이 민초들을, 헐벗고 굶주린 내 동포를 이렇게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는가. 무슨 연유로, 어떤 권한으로…….'
중근은 조금 전까지도 일본군을 우군(友軍)으로 여기며 동학군과 싸워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안태훈의 편치 않아 하는 목소리가 다시 마비되어 가는 중근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죽어 마땅한 것들이었다만, 왜병의 손에 이리 됐다니 그냥 지나치기 민망하구나. 시체들을 거두어 묻어주어라."
그 말에 마을에서 불려온 중늙은이가 펄쩍 뛰듯 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한 스무 날 전에도 수주끼가 취야에서 잡아온 동학군 여남은 명을 여기서 포살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날로 시체를 거두어 주었다가 호되게 경을 쳤습니다. 감영에서 나와 거두게 할 때까지 그냥 두셔야 합니다."
안태훈이 결기 있게 그 말을 받았다.
"그 일이라면 내가 책임지겠소. 누가 묻거든 청계동의 진사 안태훈이 이들을 묻어주고 갔다고 하시오."
하지만 그때 이미 중근의 의식은 깊이 모를 어둠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몸은 아직도 멀쩡하게 서 있었으나 기억은 그때부터 가물가물해졌다.
해주성으로 들어갔던 정탐꾼이 안태훈 앞에 나타난 것은 그들이 언 땅을 파고 다섯 구의 동학군 시체를 다 묻어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