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지적인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의 가수 이범학(43)은 당시 소녀 팬의 우상이며 엘리트 가수의 상징이었다. 그의 히트곡 ‘이별 아닌 이별’은 당시 KBS ‘가요톱10’을 비롯해 MBC, SBS 등 각 방송사 음악프로그램에서 6주 연속 1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영광. 1992년 2집 ‘마음의 거리’를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은 음악팬들의 가슴에 추억으로 남았다. 요즘 그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지난 2일 싸늘한 바람이 불던 오후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전복죽 가게 ‘해천’에서 그를 만났다.

당초 조선일보 편집국 3층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려 했지만,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서 만나고 싶었다. 일본식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해천’은 이범학 정준호가 봉사활동 중인 ‘사랑의 밥차’의 본부이다.

- 만남

‘사랑의 밥차’는 배우 정준호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민간봉사단체다. 그러나 이범학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랑의 밥차’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 비춰진 단순한 연예인 봉사단체 그 이상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범학은 “혼자서 힘들게 독거노인을 돕고 있던 해천의 대표 최성태씨는 2004년 겨울 사비를 털어 3톤 트럭에 취사설비를 갖춘 ‘사랑의 밥차’를 완성했고, 이듬해 나를 비롯해 정준호 홍종명 등 10여 명의 연예인들이 ‘사랑의 밥차’의 멤버가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가게 주인은 지금도 월세 살아요. 처음엔 나를 비롯해 주변에서는 ‘너 먹을 것도 없는데 남을 챙기느냐’고 핀잔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몇 천 만원을 들여 밥차를 만든 거예요. 그리고 고사를 지내러 오래요. 그날 (고사에) 모였던 사람들이 나를 비롯해 정준호 등 몇 명이 있었어요. 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랑의 밥차’ 활동을 시작한 거죠.”

- ‘사랑’에 빠지다.

봉사활동 초기에는 자신과의 싸움이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이범학. 친구 따라 강남 간 경우라며 자신의 첫 봉사 모습을 회상했다. “사람들 앞에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봉사를 했던 나의 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봉사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들이닥치는 날이면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연기를 해야 했는데 그 모습에 거부감도 느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봉사의 횟수가 늘다 보니 어느 순간 진짜로 봉사가 좋아지더라고요.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봉사활동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친구들에게 고마울 뿐이죠.”

- 울고 웃고.

경기침체로 인해 ‘사랑의 밥차’도 적잖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총 3대의 ‘사랑의 밥차’ 가운데 한 대는 재정이 모자라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처음엔 (사랑의 밥차를) 법인을 하자 안하자 이야기도 많이 나왔어요. 법인으로 하면 좋은 점이 있잖아요. 기업 같은 곳을 스폰서로 구할 수도 있고, 기업은 세금 감면을 받을 수 있어 좋고. 그러나 최 대표는 법인으로 봉사활동 하는 다른 곳 가운데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많이 봤다며 결국 법인 등록을 포기 하더라고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준호를 비롯해 많은 연예인들이 있지만 기업으로부터 순순히 후원을 받기가 힘들더라고요. 결국엔 우리 자비로 지금까지 빚을 내어 ‘사랑의 밥차’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운영하다 보니 지금은 빚이 많아요.”

그래도 웃는다. 이범학은 지난해 태안을 찾았던 ‘사랑의 밥차’를 떠올리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저희가 두 달 정도 그곳에 있었거든요. 아침 10시부터 해 떨어질 때 까지 기름때 묻고 허기진 사람들을 위해 하루종일 밥 짓고 설거지를 했어요. 혹시 쪼그려 앉아서 하루에 2000개 이상의 설거지를 해봤나요. 우린 즐기면서 했어요.(웃음) 비록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편하더라고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태안의 기름때를 벗기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죠.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수고하세요’라며 격려를 보내는 모습이 정겹기도 했고요. 우리나라도 아직 희망은 있다고 느꼈죠.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 위치한 한 복지관의 봉사활동 사연도 소개했다. “약 20여 명의 다운증후군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그곳을 매년 찾아가 정기음악회를 열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해 그 곳 아이들이 타조 다섯 알과 그동안 모아둔 동전을 저금통에 담아 우리에게 보내왔더라고요. 자신들은 그나마 다른 복지시설보다 나은 편이라며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그 돈을 사용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저금통을 열어보니 37만원이 있었어요. 눈물이 핑 돌았죠. 그 돈은 한 노(老) 장애부부에게 소중히 사용됐어요.”

- 이범학 히말라야를 가다.

이범학은 지난해 4월 가수 오은주 황규영 홍종명 방대식 류승혁 등 ‘사랑의 밥차’ 가수 팀과 함께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발표한 음반 ‘밥차’를 들고 히말라야 고지에 위치한 랑탕의 나야칸기봉(5894m)를 향했다. ‘최고도 콘서트’ 기네스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북한산 청계산 한라산 중턱 까지 딱 세 번 산에 오르고 히말라야를 찾았죠. 눈 위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자는데 정말 그 추위란. 씻지도 못해 냄새도 심했고. 처음엔 욕이 나올 정도로 너무 힘들어서 ‘내가 왜 이 산을 타고 있나’란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극심한 눈보라 때문에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절단 장애인과 함께 산에 오르며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끗이 씻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올해 또 한번 도전하려고 계획중입니다.”

- 이범학과 김흥국의 공통점은.

히트곡 하나로 17년 간 음악 활동을 이어가는 가수도 드물다. 대표적으로 ‘호랑나비’의 김흥국과 ‘이별 아닌 이별’의 이범학을 꼽을 수 있다. 대단한 것일까. 무책임한 것일까. 담배를 꺼내 물며 이범학은 고민에 잠긴다.

“92년도 2집을 내면서 사무실과 사이가 안 좋아졌어요. 소속사가 홍보를 전혀 안 해 주니까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2집 타이틀곡 ‘마음의 거리’는 1집 여파로 당시 ‘가요탑 10’ 9위까지는 했어요. 소속사와 1년간 왕래를 안 하면서 칩거 상태에 들어갔어요. 그 뒤 스스로 미사리와 공연장을 돌아다니며 음악활동하며 돈을 벌었고, 돈이 모이면 신곡 준비를 했어요.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17년이 흘렀네요.”

- 양치기 소년.

이범학은 2004년 3집을 발표하겠다며 잠시 방송에 모습을 비춘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전 양치기 소년이었나 봅니다. 마음만 앞서 신곡을 발표한다고 여러 차례 말만 늘어놓고 정작 실천은 못 한거죠. 소속사와의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제 스스로가 음반 발표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만들어 놓은 곡은 많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발표는 할 수 있겠죠. 그러나 17년이라는 세월동안 공들여 만든 노래를 좀 더 계획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남들 모르게 발표만 해 놓고 잊혀 지기는 정말 싫었죠. 저 혼자 마케팅까지 신경 쓰기엔 많은 부분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그동안 많은 소속사 관계자들도 만나봤지만 답은 안 나오더라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간만 흐르고 정작 음반은 나오질 못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제가 가수를 그만두고 다른 일로 전업한 줄 알아요. 하지만 전 지난 17년 동안 끊임없이 공연을 하면서 음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음악 외에는 다른 일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17년 동안 음악에 올인 했는데 여기서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 아쉽잖아요. 대박 나기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내가 만든 음악에 대해 성취감을 느끼고 싶을 뿐입니다."
 
- 첫 고백.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1991년. 방송을 틀면 언제나 그의 노래 ‘굿바이 굿바이 어디서나~’가 흘러나왔고, 이범학의 사진이 코팅된 책받침은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때다. 당시 그는 어떤 기분으로 살았을까.

이범학은 “그 환경을 즐기지 못하며 산 것 같아 아쉽다”고  대답했다. “그땐 참 젊었는데, 방송 끝나면 그냥 집에서 비디오나 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잘 나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죠. 또 아닌 말로 인기 연예인으로서 누구나 한번쯤 나보는 스캔들도 나에겐 없었죠. 가끔 친구들이 ‘너 누구랑 사귀어 본 적 있느냐’며 물어오는데 진짜 아무도 없어요.(웃음) 그게 당시 제 모습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이별 아닌 이별’ 활동 당시 이범학은 80% 이상을 립싱크에 의존하며 고통 받았다는 뜻밖의 첫 고백을 했다. “비하인드 스토리지만 1집 활동 당시 후두염을 앓고 있었어요. 당시 병원에서는 후두염의 정도가 심해 말도 하지 말고 노래는 더더욱 하지 말라고 시키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립싱크를 굉장히 많이 했죠. 그 이유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 많았어요. 밤새 스케줄은 잡혀있지, 방송은 해야 되지. 10번 중에 8번은 립싱크를 해야 했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가수야 뭐야’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가수로서 힘든 선택이었고 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어요.”

- 범욱.

이범학은 당시 그렇다할 논란도, 사건, 사고도 없는 그저 평범한 가수였다. 많은 여성 팬들에겐 미소가 아름다웠던 부드러운 향수로 기억된다. ‘정말 부드러운 남자인가’란 질문에 그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제가 욱할 때 정말 무섭게 욱해요. ‘사랑의 밥차’에서는 제 별명이 범욱이에요.(웃음) 주변에서는 전형적인 O형 스타일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당시 웃지 못 할 에피소드 하나 알려드릴께요.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난데없이 누군가 뒤늦게 타더니 자신의 목적지로 가자는 거예요. 황당했죠. 내가 먼저 탔는데 그게 무슨 경우에요. 결국 실랑이가 벌어지다, 주먹다짐을 하려던 찰라 그 사람이 ”아 이범학씨 아니세요“그러더라고요. 순간 머쓱해져 멱살을 풀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던 사건이 떠오르네요.”

- 박찬호 그리고 결혼.

이범학은 2000년 2월 13일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는 “우리는 웨이터 박찬호의 소개로 이뤄진 부킹 커플”이라며 쑥스럽게 연애담을 털어 놓았다. “지금 제 딸이 이 사실을 알면 좀 쑥스러운데 하하. 제가 미사리에서 일이 끝나고 너무 외로워 모 호텔 지하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에 놀러 가게 됐는데,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거예요. 당시 그는 제 파트너의 친구였어요. 그래서 반대편 제 친구 옆에 앉게 됐는데, 너무 예쁜 거예요. 딱 제 이상형이었죠.  그를 놓치면 정말 후회될 것 같아 용기를 내 ‘마음에 든다’고 고백을 하며 연락처를 줬어요. 딱 일주일 지난 뒤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 뒤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졌고, 2001년 결혼에 골인하게 됐어요.”

- 가수라 행복하다.

이범학도 어느새 초등학생 학부모의 입장이다. 그에겐 9살 된 사랑스런 딸이 한명 있다. 때론 가수의 신분이 딸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한다는 그다. “요즘 아이들이 저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도 딸 아이는 학교에 가면 아빠가 ‘이범학’이라고 자랑을 한데요. 그러면 그 이야기가 어느새 학부모의 귀로 전해져 딸이 호감의 대상이 된데요. 딸은 그 기분을 즐기는 것 같아요.(웃음) 언젠가 딸 아이 체육대회 때 초청가수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너무 흐뭇한   모습이더라고요. 딸은 지금도 제가 제일 잘 나가는 가수로 알고 있어요. 하하. 전세 집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저의 음악을 이해해주는 아내와 저를 훌륭한 아버지로 생각해주는 딸이 있기에 지금이 너무 행복합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