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 5년 뒤인 665년 8월, 당 태종의 칙사인 유인원과 신라 문무왕,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이 함께 취리산(就利山)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이들이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마의 피를 함께 마신 뒤 맹약문(盟約文)을 읽었다고 전한다. "웅진도독 부여융으로 하여금 백제 선왕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백제는 신라와 화친하며… 하늘에 맹세한다." 《삼국사기》는 이 맹약문을 신라의 종묘에 보관했고 제수용품은 제단의 북쪽에 묻었다고 썼다. 이른바 '취리산 회맹(就利山 會盟)'이다.

1300여년 전 이 회맹이 이뤄진 곳이 충남 공주시 연미산(해발 239m)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공주대 박물관(관장 이남석)은 지난해 12월 연미산 정상을 시굴(試掘) 조사(정식 발굴 전에 시험적으로 하는 발굴)한 결과, 꼭대기에서 대규모 석축 제단(16m×11m×1.7m)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미산은 그간 학계에서 '취리산 회맹지'로 거론돼온 후보지 중의 하나다. 1997년 공주대 박물관이 다른 후보지였던 '치미'라는 구릉형 산지(해발 52.4m)를 발굴했지만 회맹지가 아니라 5~6세기대 고분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지난해 12월 공 주대학교 발굴 단이 충남 공주 시 연미산 정상 부를 시굴 조사 하는 모습.

지난해 말 열린 지도위원회에 참석했던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제단은 7세기 무렵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산 정상부의 암반을 깨트려 터를 닦으면서 그곳에서 채취한 돌을 정연하게 쌓아 올려 단(壇)을 만들고 돌 사이에는 진흙과 불에 구운 흙, 숯 덩어리를 채워 넣었다"며 "해발 239m의 산 꼭대기에 대규모 제단을 만드는 일은 국가나 그에 준하는 세력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연미산을 취리산으로 보는 지리적·언어적 근거를 꼽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보통 높은 산 정상에서 이뤄지는데 ▲연미산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강변에 입지해 있어 모이기 쉬운 장소라는 점(지리적) ▲취리산과 연미산의 다른 이름인 취미산(鷲尾山)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언어적)이다.

이한상 교수는 "제단 축조 연대를 7세기로 추정하는 근거는 함께 발굴된 마제형문(말발굽 모양 무늬) 토기에 있다"고 했다. 이 토기는 6세기 중·후반에 유행한 신라의 전형적인 토기다. 7세기 유물이 대거 출토된 부여 능산리 사지와 정림사지에서도 발굴된 바 있어 학계에선 백제 멸망기에 신라로부터 반입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토기가 백제 도성뿐 아니라 공주 연미산에서 출토된 것은 7세기 무렵 신라인들이 이 산 꼭대기에서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발굴단 내부에선 "석단이 봉수대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신중론도 있지만, 이 교수는 "불을 피우는 시설 흔적이 전혀 없어 봉수대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미산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취리산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본격 발굴을 통해 유적이 추가로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