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9년 5월 4일. 조선 17대 왕 효종이 승하했다. 병자호란 때 청에 볼모로 끌려가 고초를 당한 소현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의 처지로 인조의 왕위를 이른 효종. 그는 즉위 5년 간 북벌을 꿈꾸다가 만40세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런 효종의 입관(入棺)을 앞두고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퉁퉁 불어난 시신이 널에 들어가지 않은 사태가 빚어지고 만 것이다. 사람이 죽어 염을 할 때는 시신이 붓지 않도록 힘껏 묶어야 하는데, 왕의 경우는 환생을 바라는 뜻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고 살짝 묶는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효종의 시신은 그마저 묶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예조의 관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민가를 수소문했지만, 크고 넓은 관을 따로 구할 수가 없었다. 송시열과 정태화 등 대신들은 궁여지책으로 널을 이어서 쓰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세자는 "여염집에서도 널을 이어서 쓰는 법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입관을 늦추면 더 망측한 일이 생길 터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관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그러나 정작 더 시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인조의 계비이며, 효종에게는 어머니인 조대비의 복상 기간이 문제였다.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는 장자의 경우 삼년상을, 차자 이하의 경우는 1년상을 치르게 돼 있었다. 종통은 장자만이 이어받을 수 있었고, 부모에 앞서 장자가 죽으면 다른 자식을 제치고 장손이 대를 이었다. 장손이 없으면 차남이 아닌 제3자를 양자로 들여서 가계를 잇게 했다. 그것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성리학적 원칙이었고, 오늘날의 헌법과 같은 종법(宗法)이었다.
그 원칙에 따라,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김수항 등은, 효종은 장자가 아니므로 조대비가 마땅히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가와 일반 민가가 다를 바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미수 허목과 윤선도 등 남인 세력은, 왕통을 이은 것 자체가 장자의 지위를 얻은 것이라 하여, 국상에 대해서는 무조건 3년복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조대비는, 효종이 차남임이 강조되면 1년복이요, 왕통이 강조되면 3년복을 입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서인과 남인이 벌인 복제 논쟁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었다. 허목과 송시열은 모두 전형적인 예치(禮治)론자였다. 하지만 허목은 철저한 왕권에 기반을 둔 예치를 추구했다.
효종이 죽고 닷새가 지나,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복제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현종은 국제(國制)에 따르라고 했다.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자나 차자, 서자를 가리지 않고 부모는 1년을 입는다고 돼 있었다. 물론 그것은 조선 전기의 법전이었고,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성리학적 원칙으로 되돌아가는 추세였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도 1년복을 입은 사례가 있었다는 점을 들어 서인 세력은 1년복을 밀어붙였다. 열아홉 살 현종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 세력의 손을 들어주면서 복상 기간을 둘러싼 논쟁을 매듭지으려 했다.
그런데 효종이 승하한 지 11개월이 지났을 무렵에 남인의 영수 허목이 복제에 관한 상소로 올렸다. 송시열 등이 정한 1년복이 예에 어긋나며, 장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차자가 대를 이으면 그 또한 마땅히 장자가 된다고 주장했다. 조대비가 상복을 벗기 한 달 전, 허목이 논쟁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다. 그러자 송시열은 "장자가 둘일 수는 없으며, 게다가 대왕대비는 장자인 소현세자가 승하했을 때도 1년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들어, 허목의 주장을 반박했다. 효종은 왕이기 이전에 둘째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허목과 송시열은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이에 현종은 교지를 내려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미 결정한 대로, 대왕대비의 복제는 국제에 따라 1년복으로 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이로써 1차 예송논쟁은 1년복으로 결정됐다. 남인의 영수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표면상으로는,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서인의 승리였다. 그러나 현종이 송시열의 주장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즉 효종을 장자로 대우할 것인지, 차남으로 볼 것인지는 미결 사안으로 남게 됐다.
반면 송시열은 사대부, 즉 신권을 바탕으로 한 예치를 꿈꾸었다. 그래서 효종을 적장자로 대우하게 되면 종법이 무너지고 필연적으로 사회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고 믿었다. 통치이념과 사상에서 이들은 서로 뿌리가 달랐던 것이다. 왕권이냐 신권이냐, 결국은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