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의료기관의 정자(精子)은행에 인공수정에 쓰이는 정자가 부족해 일부 불임 시술이 중단되는 등 차질을 빚고 있다. 2005년 정자 매매를 금지한 생명윤리법이 시행된 이후 순수 정자 기증자가 줄면서 정자가 바닥나 빚어지는 일이다.

과거 상당수 병원들은 의과대학생 등을 상대로 '용돈'을 줘가며 설득해 정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이마저 압력에 의한 기증으로 해석되면서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정자은행이 '무(無)정자증'에 걸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인 남성의 약 1~2%는 무정자증이거나 수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자의 활동성이 떨어져 있다. 불임부부 20쌍 중 한 쌍 정도가 이런 문제로 임신에 실패하고 있다. 이 경우 정자은행에 기증된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을 해야만 엄마의 유전자라도 물려받는 아기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불임시술 전문 병원인 관동의대 제일병원의 경우 현재 700여명 분의 정자만 남아있다. 한 달에 정자은행 정자를 이용한 인공수정이 40여건 이뤄지고, 한 번에 4~5번 인공수정을 시도해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매달 200여명분의 정자가 필요하다.

정자은행장인 비뇨기과 서주태 교수는 "지금 추세라면 3월에 거의 모든 정자가 바닥나 '남성 불임 인공수정'이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혈액형 A형의 정자는 없어서 A형 남편이 무정자증일 경우에는 인공수정을 못하고 있다. 정자은행 정자를 인공수정에 쓸 때는 '불임 남편'의 혈액형과 일치하는 정자를 쓴다. 아이와 부모의 혈액형이 맞지 않으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친부모 관계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신문에 정자 기증자 급구(急求) 광고를 내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고 전했다.

포천중문의대 강남차병원도 보관된 정자가 200여명분만 남아 있다. 정자은행 관계자는 "O형을 제외한 A형, B형, AB형 냉동 정자 불임시술은 중단된 상태"라며 "지난해부터 정자가 필요한 남성 불임 부부들을 그냥 돌려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대·전남대 등 지방병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예 정자은행 문을 닫는 곳도 많아 2005년 이전 전국에 10여개에 이르던 정자은행이 현재는 6곳만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대부분의 정자은행들은 불임 부부가 정자 기증자를 한 명 데리고 오는 경우에만 맞교환 형태로 이들에게 냉동 정자를 내주고 있다. 생명윤리법상 정자 기증자의 신원을 불임부부가 아는 경우는 그 정자를 인공수정에 사용할 수 없다. 정자 매매 가능성을 차단하고 정자 기증자가 뒤늦게 부권(父權) 주장 등으로 법적 또는 금전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채취한 정자도 쓸 수 없다. 반드시 6개월 이상 냉동보관된 불특정인의 정자만 쓸 수 있다. 에이즈 등 감염성 질환 잠복 유무를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자은행들은 불임부부가 정자 기증자를 데리고 오면 이는 냉동보관하고, 대신 냉동 정자를 내주는 궁여지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남성 불임 부부들은 불임의 고통 외에 정자 기증자를 백방으로 뛰어 구해와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정자은행의 정자 기근 현상은 정자 기증에 대한 뚜렷한 동기 부여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신장·간 등 장기 기증은 가족의 질병 치료를 위해 쓰이고, 헌혈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하지만 정자 기증은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기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적 혈연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순수 기증자를 모으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증자의 조건도 20~40세인 적정 체격의 남성이어야 하며 간염·성병·에이즈 등 감염성 질환도 없어야 한다. 그만큼 기증자 폭도 좁다. 동일 유전자를 갖는 아기가 여러 명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명의 정자로 여러 쌍의 불임부부에 사용할 수도 없다. 정자 기증자에게는 10만~20만원의 교통비가 주어지며, 정자를 매매할 경우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한편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남성 불임부부'에게 양질의 정자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정부가 지역별로 공공(公共) 정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자 매매를 인정해 상업성 정자은행이 수십 곳 성업하고 있으며, 매년 약 3만명의 아기가 이를 통해 태어나고 있다.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장 비뇨기과 박남철 교수는 "남성 불임의 30%는 기증 정자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불임 해결책인데 민간 차원에서는 정자 기증자를 대거 확보할 여력이 없다"며 "우리나라도 저(低)출산 대책 일환으로 정부 지원의 공공 정자은행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