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검(雲劍)은 조선시대에 칼을 차고 임금을 호위하던 직책을 가리킨다. 대통령 경호실장과 비슷한 직책이었으므로 품계도 높았다. 2품 이상의 무반(武班)이 받는 임시 벼슬이었는데 임금을 최측근 거리에서 경호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자리였다. 따라서 왕의 신임을 받는 무반이라야 운검이 될 수 있었다.

운검의 숫자는 2~4명인 경우가 많았다. 보통 2명의 운검이 임금이 나라의 큰 잔치나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에 좌우에 서서 큰 칼을 차고 지켰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이 낙천정에 갔을 때 2명의 운검과 73명의 호위군사가 국왕을 호위하였다고 나온다. 운검 밑에는 수십 명의 호위무사 집단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운검 중의 하나는 성승(成勝,?~1456)이었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배후에서 주도했던 인물이다. 성승은 세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로 출세 길에 올랐다. 세종대에 경상도 병마절제사를 거쳐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왔고, 문종 때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

그러나 세조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되자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을 하였다. 마침내 아들인 성삼문을 비롯,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세조를 칼로 죽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 날짜는 1456년(세조 2년) 6월 1일 세조가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날이었다. 이날 성승은 유응부, 박쟁과 함께 왕의 뒤에 운검으로 서 있다가 칼로 내리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일에 세조는 잔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이 서 있을 필요가 없다는 명령을 갑자기 내렸다.

느낌이 이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세조의 운인가? 결국 거사계획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비밀이 새어나가면서 성승 일가를 비롯한 사육신이 모두 체포되었던 것이다. 고려대 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운검이 사용하던 칼(운검)을 전시하고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칼자루와 칼집은 모두 어피(魚皮)로 감쌌고, 장식은 황동(黃銅)으로 만든 칼이다. 칼을 보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