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 보고서를 내놓자 미국이 경악했다. 고교 1년생의 수학 성적이 미국은 29개국 중 24위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장래가 암담하다"고 썼다. 로스앤젤레스 고교생 중 55%가 중퇴하고, 미국 전체 공립 고교생의 30%가 중퇴하며, 흑인·히스패닉계 고교생은 20%만 물리학 교육을 받는다…. OECD 보고서 이후 미국의 암담한 공(公)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후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공교육을 회생시키려는 시도가 미국 전역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교실의 몰락'을 학부모 허리 휘는 사(私)교육으로 지탱하지만, 미국은 지역사회가 기업의 힘을 빌려 함께 풀고 있다.

스쿨 오브 더 퓨처 3학년‘러너(학생)’들이‘ILC(도서관)’에 모여 지역 박물관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학교에선 학생을 러너(배우는 자₩learner)로, 교장을 치 프러너(chief learner)로, 도서관은 ILC(쌍방향 학습 센터₩interactive learning center)로 바꿔 부른다. 필라델피아=김정훈 기자

기업에 구조를 청하다

'스쿨 오브 더 퓨처(School of the Future·미래의 학교)'. 이 멋진 이름의 학교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파크사이드 애비뉴에 있다. 학교는 흰색의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이지만, 주변은 건물의 시멘트 철골이 곳곳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빈민가였다.

3년 전만 해도 서부 필라델피아 지역 고교의 출석률은 76.3%밖에 안 됐고, 사흘 걸러 한 건씩 마약·알코올 등의 사고가 발생했다. 학생의 80%는 수학에서, 59%는 독해에서 낙제점이었다.

무너진 공교육 앞에 절망한 지역사회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 구조를 요청했다. 필라델피아 교육당국의 요청을 받은 MS는 6300만달러를 들여 새 학교를 짓고, 전교생에게 노트북 컴퓨터를 지급했으며, 전산 운영 시스템을 이식해주었다. 소프트웨어의 유지 보수를 위해 직원 2명도 학교에 파견했다.

필라델피아 교육청은 MS와 함께 '정답 맞히기'보다 '문제해결'에 적합한 교육과정을 개발했다. 프로젝트를 학생 스스로 정하고 성취하게 하는 경영대학원(MBA)식 학습방법이다. 교육 목표는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지식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키우는 것으로 잡았다.

2006년 9월, 3층짜리 '스쿨 오브 더 퓨처' 건물이 완공되고 170명의 신입생을 받으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추첨으로 신입생을 뽑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10대 1에 가까운 경쟁을 치러야 했다.

낙오자를 최소화한다

11학년(고교 3학년) 쿠에타 페어리(Fairy·17)양은 보육 교사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변 아이들이 하는 나쁜 짓은 다 따라한' 문제아였다. 옅은 보라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인 페어리는 "중학교 때만 해도 내가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고 했다.

학교는 그녀를 변화시켰다. 컴퓨터로 채팅이나 마이스페이스(미국판 싸이월드) 말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MS가 파견한 교육프로그램 매니저 스테이시 레이니(Rainey)는 "학생들이 첨단기술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변하는 세상에 쉽게 적응해, 학교에서 낙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기본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낙오자를 줄이자고 모든 아이들을 획일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 2층 250호실에는 30명의 학생들이 낙엽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퇴비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곳은 일종의 영재(mentally-gifted)반이다.

1층 170호실은 자폐 증상을 가진 학생 8명이 머무는 방이다. 교실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들은 학기 초 새로 지급받은 컴퓨터를 앞에 놓고 키득거리며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과목 대신 프로젝트 중심

학교 시간표는 영어·수학·과학 등 과목(subject) 중심이 아니다. 한 학기 혹은 2년짜리 프로젝트(project)를 정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움직인다. 서로 다른 과목 교사 4명이 한 팀이 돼 학생 30~40명의 프로젝트를 이끌고, 학기 말에 발표하는 형식이다. 사회에 필요한 교육을 받는 일종의 '선행 학습'인 셈이다.

체육 교사인 찰리 볼티모어(Baltimore)가 다른 교사 3명과 함께 이번 학기에 이끌게 될 프로젝트 제목은 '식품의 정치학'이다. 아이들은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식품이 어떻게 유통되는지와 학교 급식 식당의 메뉴를 자율적으로 바꾸고 요리하는 방법 등을 배우게 된다.

하루의 절반을 쏟아야 하는 큰 프로젝트뿐 아니라, 작은 프로젝트(mini-project)도 이수해야 한다. 4년 동안 인근 벨몬트 맨션 박물관을 정기적으로 찾아 역사를 배우고 박물관 기념품으로 팔릴 만한 상품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며, 필라델피아 동물원에서 동물학을 배우는 과정 등이 미니 프로젝트에 들어 있다.

대학 입시 안 보면 졸업 안 시켜

지금은 교복이 있지만, 2006~2007년 학교는 학생들에게 대학 티셔츠를 입게 했다. 하버드·UCLA 등 미국 전역의 대학 티셔츠가 학생들에게 공급됐다. 미술 교사인 영 킴(Kim)은 "필라델피아 소재 대학교만 겨우 알고 있던 아이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는 교실의 이름도 나라 이름으로 바꿔 부른다. 110호실은 브라질, 140호실은 일본이라고 하는 식이다. 글로벌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주기 위해서다.

등·하교 시간을 다른 학교보다 1시간30분 늦게 정한 것도 이 학교의 독특한 교칙이다. 이 학교는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3시에 끝난다. 이른 아침은 학습 능률이 좋지 않고, 일찍 학교를 마치면 탈선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졸업 전에 대학에 지원해 보지 않으면 졸업을 시키지 않는다. 대학에 떨어지든, 붙었는데 가지 않든 상관없다. 도전해 봤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2010년 7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다. 로잘린 치비스(Chivis) 교장은 "아이들에게 지식사회에 적합한 문제의식과 도전의식을 키워 주는 것이 우리의 교육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