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수희 31
수남 29
무대
작은 원룸으로, 전체적으로 심플하다.
맨 앞에서 (왼편 1/3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객석을 등지고 있다. 배우가 뒤로 섰을 때 허리부분에 못 미치는 높이이다.
설거지되지 않은 식기들이 제법 쌓여 있다. 물론 가짓수는 별로 되지 않는다.
무대 중앙에는, 왼쪽으로 작은 텔레비전이 오른쪽을 보고 있다.
오른쪽에는 길쭉한 소파가 옆벽에다 등을 붙이고 TV를 보고 있다.
맨 뒷벽에는 작은 신발장과 현관문(둘 다 배달음식 전단지와 스티커로 가득 찬)이 있다. 문은 여닫을 때 소파와 약간 마찰이 있을 만큼 붙어 있다. 왼 벽에는 큰 시계, 달력, 그림 따위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다.
막이 오르면.
수남이 속옷 차림으로 남자 반팔 티 하나 입고 소파에 누워 있다. 얇은 요에 다리를 말고선, 리모컨으로 몇 번 채널을 바꾸고, 이따금씩 하품을 하거나 머리를 벅벅 긁는다.
문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수남 : 그냥 들어와~
수희, 시장바구니를 바리바리 든 채로 들어선다. 수남은 쳐다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다시 열고 나가더니 봉지를 몇 개 더 들고 들어온다.
수남 : 뭘 기대하고 문을 두드려? 이런 좁아터진 집구석에, 문 열어주는 남자라도 있을 줄 알어?
수희, 문을 닫고 봉지들을 싱크대로 다시 하나하나씩 옮긴다.
수남 : 무슨 옷을 그렇게 두껍게 입었대? 칼도 못 뚫겠어, 아주. 누구한테 원한 샀어? 왜 방탄복을 입고 다녀? (까르르 웃고) 밖에 추워? 아, 난 추운 거 정말 싫어하잖아. 벌써부터 진저리가 나. 매년 지겨워 죽겠어. 겨울은 삼 년, 아니다 오 년에 한 번씩 오면 안 되나?
수희 : (보지 않고) 옷이나 입어.
수남 : 체질에 안 맞나 봐. 옷은 한 겹만 껴입어도 좀이 쑤신다니깐. (봉지들 보며) 얼마 만에 보는 동생이라고, 얼굴도 한번 안 쳐다 봐? 요새 아줌마들은 기억력도 좋지. 난 몇 년만 안 보면 홀딱 까먹고 그래. 밖에서 보면 엄마도 못 알아보고, 누구세요, 이럴 걸.
수희 : 아무리 혼자 산대도 그게 뭐니. (자기 옷 벗어 걸면서) 문도 다 열어놓고.
수남 : 강도라도 좀 들르라고 그런다, 왜? (잽싸게 봉지들 뒤적거리며) 이야, 언니 장 한번 제대로 봤구나? 우리 싱싱한 전복 얼굴 좀 보자. 이게 다 뭐야? 쌀은 왜? 먹지도 못할 걸. 아, 김치 냄새. 김치 놓을 데도 없는데! 이건가? (다 뒤지다 꺼내고) 뭐야! 내 전복은?
수희 : 참치죽도 맛있어.
수남 : 뭐? 참치?
수희 : 일단 먹어 보고 말을 해.
수희, 봉지를 풀어 싱크대 뒤적거린다.
[극 내내, 수희는 정면을 보고 묵묵히 요리를 한다]
[수남의 말에 수희의 대답이 언제나 한 템포씩 느리고 어눌하다. 그만큼 요리와 싱크대 청소에 집중을 하고 있어야 한다. 수희의 손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마지막에는 죽이 완성되어야 한다]
수남 : 내가 전복죽 먹고 싶다고 했지, 언제 참치에 밥 비벼 먹재? 전복 사오라고, 빨리! 전복! 이럴 거면 내가 해먹지, 언니 왜 불렀겠어?
수희 : 밥통도 없니? 햇반 사오길 잘했네.
수남 : 내가 지금 이 몸에 그런 거 먹게 생겼어? 언니, 왜 그래? 요새는 장을 편의점에서 봐?
수희 : 밥 좀 해먹고 살아라. 도둑도 안 들어오겠어. 빈 집인 줄 알고.
수희, 참치캔 따서 기름 빼고, 시금치 씻는다.
수남, 앉아서 TV 본다.
수남 : 하여튼 대단하다, 대단해! 어쩜 저렇게 변하질 않니. 하나뿐인 동생한테 먹이는 게 그렇게 아깝니? 꼴랑 참치? 나 같으면 전복이 뭐야, 캐비어랑 꽃등심, 온갖 산해진미도 푹푹 퍼다 줄 거야. 나 죽으면 제사상에 뭘 올릴까? 조기? 산적? 장국이나 끓이면 다행이게. 보나마나 뻔하지.
수희 : 왜 니 제사상을 내가 올려? 그리고 말 한번 잘 했다. 캐비어 맛있는 거, 나도 좀 알려줘라. 맛을 알아야 퍼다 주지.
수남 : 내가 이 집을 빼서라도 사 줄게. 그러니깐 전복 좀 사와라, 오늘은. 정말 먹고 싶어서 그래. 전복이 짱깨도 아니고, 배달도 안 되는데. 딱 한 번만, 엉? 언니,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수희 : 제철도 아니야, 전복.
수남 : 내가 먹고 싶으면 제철이지. 철 따져서 밥 먹어? 입맛 따져 먹지. 내가 뭐 부탁한 적 있어? 딱 한 번이잖아? 그제는 전복 꿈까지 꿨어. 아니, 얼마나 먹고 싶으면 꿈속에서도 전복을 캐러 다니겠다구, 엉?
수희 : 소금 없어?
수희, 물 올려서 시금치 데친다.
수남 : 전복죽!
수희 : 칼 더러운 것 봐. 설거지 좀 해라.
수남 : 전복 아니면 안 먹어.
수남, TV 볼륨 높인다.
수희, 설거지하면서 당근과 양파 같이 씻는다.
수남 : 안 먹는다고!
수희 : ……. (능숙하게 설거지)
수남 : 하지 마!
수희 : …….
수남 : 안 먹는다니까!
수희 : 내가 먹을 거야.
수남 : 니 집 가서 먹어! 왜 남의 집에 와서 먹어?
수희: 누가 문 열어주래?
수남: 전복이 온 줄 알고 열었지, 누가 너 온 줄 알고 열었냐?
수남,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으로 채널 휙휙 돌린다.
수남 : 그래, 됐다, 됐어! 더러워서 안 먹는다, 전복. 니가 그렇지, 뭐. 늘 그 따위니깐.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난 또, 갑자기 오케이 하길래, 니가 좀 미쳤나 했어. 근데 아주 다행이네. 아직 제정신은 제정신이구나. 멀쩡하네. 지 먹을 것만 쏙 사온 거 보면. 누가 그러라고 오랬어? 그래, 많이 만들어서 너 혼자 다 처먹고 가라!
수희, 시금치 꺼내고, 당근 껍질 깐다.
수희 : 떠들 기운 있으면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수남 : (벌떡 일어나 앉고) 난 뭐, 밸도 없는 줄 알아? (뺨 두드리면서) 아직도 얼얼해. 기스라도 났으면 어쩔 뻔 했어? 생각만 하면 진짜……. 시집도 못 갈 뻔 했어, 나! 봐 봐, 여기! 다 나은 줄 알아? 말 나오는 게 용하지. 안에서 곪았는지, 딱딱한 거 일절 먹지도 못해. 그래서 죽 좀 먹자는데, 뭐, 참치? 참치나 먹으라고? 엄마가 보냈어, 엉? 내 염장지르라고? 둘이서 짰구나!
수희, 당근과 양파 썰기 시작한다.
수희 : 화나셨어, 엄마.
수남 : (TV 보면서) 호적 파라고 해, 파! 하긴 팔 호적이나 있긴 하대? 내 이름이 있대, 거기? 내가 뭐 무서워할 것 같아? 사람 잘못 봤습니다. 딸 하나 덜 낳은 셈 치라고 그래, 맘 편하게. 내 사진, 있지도 않겠지만, 있거든 말짱 다 태우고! 내 물건 남아 있는 거 싫으니깐. 아으, 짜증나. (보고) 막말로 그래, 자기가 나한테 뭘 해준 게 있다고 사람을 쳐, 응?
수희 : 넌 엄마한테 뭘 했다고, 큰소린데?
수남 : 할 만큼은 다 했어! 나 정도면 큰소리가 뭐야, 고함을 질러야 돼.
수희 : 이미 질렀지. 앞집, 옆집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내가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수남 : 이제 와 엄마 모신다고, 유세하니?
수희 : 여기로 데려올까, 그럼?
수남 : 치고 받고 싸우라고?
수희 : 것도 재밌겠네.
수남 : 니가 더 재밌지. 뭐가 그렇게 당당해? 대학 다닌다고 등록금 다 빼먹고, 돈 그렇게 처발라서 졸업시켜줬더니! 뭐? 내가 할 말이 다 없다. 어디 건달 새끼랑 눈이나 맞아서는.
수희 : 형부한테 말이 그게 뭐야.
수남 : 형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엄마한테 그 새끼 애까지 키우게 하면서 니가 뭘 했다고 생색이야?
수희 : 씹을 단물이 아직도 남았어?
수남 : 단물 빠지려면 멀었어. 솔직히 엄마가 거기 사는 것도 말이야. 니가 벌인 거 책임지는 것밖에 더해? 구암동 집 팔라고 살살 꼬셔서, 엉? 엄마 돈 남은 거까지 탈탈 털어갔잖아?
수희, 당근 썰던 칼로 삿대질하면서.
수희 : 윤아 아빠, 밤낮으로 택시 몰아서 꼬박꼬박 갚고 있다, 왜!
수남 : (더 세게) 하루 이삼만 원으로 언제 이천 찍을 건데!
수희 : (다시 요리) 그게 니 돈이야? 니가 왜 난리야?
수남 : 내 돈이기도 해! 너는 학교 다닌다고 돈 따박따박 타갈 때, 나는 죽어라고 일만 했어. 그 잘난 공부 한답시고 설치길래, 난 스무 살 때 미싱 돌렸다고! 억울하고, 더러워도 꾹 참고!
수희 : 니가 디자이너 하겠다고 대학 안 갔잖아!
수남 : 니가 재수하는 바람에!
수희 : 무섭다, 진짜……. 언제 적 얘기야?
수남 : 십 년도 안 됐어! 니가 서울에서 시험 준비한다 뻥치고, 그 건달 자식이랑 놀아날 때도 나는 돈 벌어서 엄마 옷이랑 화장품 사줬어. 넌 뭐했는데, 그때? 니가 엄마한테 로션 하나라도 사줘봤어?
수희 : 나도 다 사드렸어!
수남 : 아하, 그 싸구려? 그거 사다놓고, 엄마 거랑 바꿔 쓰잖아!
수희 : 엄마가 안 쓰길래 쓰는 거지!
수남 : 말은 똑바로 해. 내가 저번에 명품 사줬더니, 뻔히 뺏어갔더라? 왜 내가 사준 걸, 니가 하고 다녀?
수희 : 엄마한테 물어 봐, 아니야!
수남 : 아니긴 뭘 아니야! 내가 다 봤는데.
수희 : 한 번 했다, 딱 한 번. 동창회 가는데, 엄마 가방 좀 빌린 게 그렇게 열 받는 일이니?
수남 : 가방 말고도! 코트는 또 어떻고?
수희 : 엄마가 준 거라고, 자기 못 입는다고!
수남 : 니가 자꾸 훔쳐가니깐 못 입지!
수희 : 사이즈나 제대로 사서 보내! 엄마가 십 년 전이나 똑같은 줄 알아? 지금은 육십 킬로도 넘어. 그렇게 작은 걸 어떻게 입어? 너 엄마 취향은 알고 보내니? 아니, 나이는 알아? 그런 거 사서 보낼 시간 있으면, 직접 와서 엄마 얼굴이나 들여다 봐!
수남 : 보러 갔다가 무슨 꼴 당했는데!
수희 : 몇 년 만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너 같으면!
수남 : 됐어! 다 지긋지긋해. 너나, 엄마나. 빨리 가! 니 집에 가라고. 가서 그 좋아 죽는 니네 엄마 끼고 놀아. 왜, 여기 와서 지랄이야?
수희 : 잘 아네. 안 그래도 가서, 짝짜꿍할 거니깐!
수남, 벌러덩 눕는다.
수희, 묵묵히 시금치 물기 짜고 양파와 당근 다지기 시작한다.
수남 : (TV 보면서) 너나 엄마나 똑같아! 아부지도 다 똑같지! 어쩜 그렇게 다들 얄밉게 구는지……. 아부지, 어땠는 줄 알아? 너 좋은 회사 취직했다고, 날 얼마나 면박 주던지! 내가 백만 원, 이백만 원 드려도 꿈쩍 않던 양반이 말이야. 니가 싸구려 내복 한 벌 사왔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라! 아주 침을 줄줄 흘리더라!
수희 : 돌아가신 양반 얘길 뭐 하러 해?
수남 : (TV 보면서) 그러고도 나한테 뭐라 했는 줄 알아? 다 때려치우고, 회사 다녀보래, 너처럼! 그래야 사람 구실한다나? 그럼 뭐, 나는 사람도 아니었어? 아부지 돌아가시는 그날에도 너만 찾았어! 병수발은 내가 다 들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는 널 찾더라, 너 데려오라고! 다들 김수희, 김수희, 김수희……!
수희 : 엄마한테 잘 좀 해.
수남 : 신경 하나 안 쓰다가 갑자기 왜 그래? 왜 이제 와서 걱정해주는 척하냐고? 너나 엄마나 다 역겨워, 아주! 혐오스럽다고!
수희 : 그럼 떼! (크게) 애 떼라고!
수희, 수남 한번 보고는 묵묵히 야채 썬다.
수희 : 수술해. 내일이라도 하자. 정 뭐하면, 같이 가줄게. 너 그러다 나중에는 진짜 못 떼. 진짜 낳아야 된다고.
수남 : 못 낳을 건 뭔데!
수희 : 물론 니 마음도 이해해. 네 심정 모르는 거 아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엄마가 오죽하면 손까지 올렸겠어? (타이르듯) 애는 말이야. 엄마 아빠 화목한 집 만들어서 낳으면 되잖아? 결혼하고, 집도 있고, 남편도 있고……?
수남 : 결혼은 나중에 하면 돼.
수희 : 너 이제 스물아홉이야. 내년이면 서른이라고.
수남 : 니가 너무 빨리 한 거지, 비상식적으로.
수희 : 어떻게 키울 건데?
수남 : 왜 못 키워? 나, 돈 많아! 차도 있고, 가게도 있고, 아이 생기면 집도 더 큰 데로 옮길 거야.
수희 : 아이 아빠는?
수남 : 봤잖아, 그때!
수희, 야채 써는 칼 소리가 더 커진다.
수희 : 너 어렸을 때, 아버지 싫어했잖아, 책임감 없다고. (리듬감 있게) 일거리 없다고 만날 잠만 자, 돈도 못 벌어와, 집에서는 못질 하나 안 해, 애들이랑 놀아주지도 않아, 그렇다고 마누라한테 살갑기나 하나? 성질머리는 어찌나 불같은지! 아버지도 자격증 시험 보고, 필기 실기 다 합격한 사람만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그랬잖아, 네가.
수남 : 민준 씬 달라. 아부지랑 다르다고.
수희 : 뭐가 다른데?
수남 : 민준 씬 능력 있어. 자상하고. 성격도 좋아.
수희 :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있잖아, 이미 다! (보고) 아내도 있고 애도 둘이나 있다며.
수남 : 갈라섰어!
수희 : 이혼한 건 아니잖아! 다시 합치면?
수남 : 그럼 내가 키워. 내가 애 하나 못 키울 것 같아?
수희 : 네 몸 하나 건사 못 하면서 무슨 애를 키워?
수남 : 너 진짜 웃긴다! 내가 너한테 손 벌린 적 있어? 너나 잘 해! 지 주제도 모르고…….
수희 : 윤아 아빠는 사별했잖아!
수남 : 나랑 뭐가 다른데?
수희 : 같니, 산 사람이랑 죽은 사람이랑?
수남 : 내가 죽은 사람으로 만들면 되지!
수희 : 그게 쉬울 것 같아? 애들도 크다면서? (보고) 행여나 버리고 오겠다? 너 하나 때문에?
수남 : (중얼) 지도 남의 자식도 데리고 살면서…….
수희 : 그래, 나 밥 한번 안 굶기고 잘 하고 있다. 내 딸이야, 내 딸. 윤아, 윤정이 둘 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친딸이라고.
수남 : 적어도 난 걔들처럼은 안 키울 자신 있어! 어린이집 보낼 거고, 아주 좋은 데로. 비싼 옷도 다 사 입히고, 매일 매일 좋은 것만 먹일 거야! 니가 뭘 잘 키우는데? 뭐, 밥을 안 굶겨? 요새 밥 굶고 다니는 애가 어디 있어? 뭐, 친딸? 좋다 그래. 친딸한테 그렇게밖에 못 해주냐, 넌?
수희 : 참기름 없어?
수희, 프라이팬에 식용유 두르고, 다진 야채 볶기 시작한다.
수남, 수희에게 가서 음식 못하게 한다.
수남 : 말을 해봐! 너는 잘 키우고 있냐고? 밥 차려주는 게 그렇게 대단해? 나 같으면, 그 시간에 나가서 돈을 더 벌겠어! 그래서 다음 날 더 맛있는 거 사주고, 그 다음다음 날 더 좋은 옷 입히고!
수희 : 무슨 강아지 키우니? 태도부터 바꿔! 애가 애완동물도 아니고!
수남 : 거지의 딸이 좋겠니? 차라리 부자의 개가 낫지.
수희 : 그런 말 하면서 어떻게 밥이 넘어가? 뱃속의 애는 안 토한대니? 엄마가 저런 말 하면서 밥 먹는데!
수남 : 그만해! 니가 한 거 먹기 싫다고!
수희, 수남보다 더 거칠게 수남을 밀쳐낸다.
수희 : 그럼 지금 버려?
수남 : 버려!
수희 : 그래, 다 하고나서 내가 내 손으로 버릴 거니깐! 비켜!
수희, 햇반 뜯어 프라이팬에 넣고 물도 부어 더 볶는다.
수희, 내내 죽을 정성껏 젓는다.
수남 : 어차피 버릴 거, 지금 버려!
수희 : 다 했어. 십 분만 더 끓이면 돼.
수남 : 꼴랑 참치로 죽 하나 끓이면서 생색이야? 안 먹어. 우리 애한테는 싸구려 안 먹인다고!
수희 : 영양도 많고, 건강에도 좋아.
수남 : 그래서 걔들 얼굴이 그래? 참치를 얼마나 먹였길래? (앉고) ……왜, 윤정이도 뗐어야지, 나처럼! 걔는 왜 낳았어? 나나 너나 똑같애. 걔는 또 무슨 고생이야? 지웠어야지, 왜 윤정이까지 낳아서 세트로 그러고 있어?
수희 : 그만해, 좀! 왜 잘 사는 애들을 갖다 붙여?
수남 : 그게 잘 사는 애들 꼬라지야? 걔들, 친구는 있대? 시장에서 팔다 남은 것 같은 옷이나 입혀서 내보내서, 엉? 그것도 물려 입고 다니지? 걔들이 어리다고 모를 줄 알아?
수희 : 그래, 몰라서 그런지 너무 잘 지낸다! 애들이 어쩜 그리도 소박한지 말이야. 바자회에서 산 옷도 예쁘다고 친구한테 자랑하고 다니고, 라면만 끓여줘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말도 못 해.
수남 : 넌 그걸 보고 만족하겠지. 아, 웃고 있으니깐 좋아라 한다? 그치만 걔들은 아닐 걸! 애는 엄마가 키우는 게 아니라 엄마의 능력이 키우는 거야. 니가 해줄 수 있는 게 뭔데? 금방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까지 갈 텐데. 너, 돈 있어? 두 명 뒷바라지 할 수 있어? 학원비랑 과외비랑 하물며 친구들이랑 과자 사 먹을 돈이라도 두둑이 한 번 쥐어 줄 수 있어?
수희 :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니가 언제 내 걱정까지 하고 살았니? 근데 나 요새 그 정도는 아니야. 임대료도 거의 다 모았고,
수남 : 그거 말고, 애들 위한 돈!
수희 : 돈이 단 줄 알아? 네가 애 둘 키워봤어?
수남 : 꼭 키워봐야 알아? 윤아? 윤정이? 난 걔들 불쌍해 죽겠어! 단칸방에서 무능력한 아빠, 엄마 보면서 뭘 보고 배우겠어? 제대로 가르치고 먹이고 입힐 수 없으면 애를 낳지 말았어야지!
수희 : 네가 열 살이야?
수남 : 안 봐도 훤해.
수희 : 너 말이야, 너. 지겹지도 않니? 언제까지고 그 말을 달고 살 거야?
수남 : 내가 언제 틀린 말 했어?
수희 : 우리 아버지 돈은 못 벌었지만, 어디 빚 한 번 안 지고 사셨어. 평생 노상에서 구두 닦으셨어. 나름 열심히 사셨다고!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그래, 지고지순하진 않으셨지. 바람 한두 번이야, 어디든 불어. 하지만 엄마한테 손 한 번 안 올리셨고, 우리한테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신 양반이야.
수남 : 난 이제껏 아부지 도움 없이도 잘 살았어.
수희 : 그래서 네가 망했다고 생각하잖아!
수남 : 돈을 안 주는 것도 폭력이야! 아부지는 양심도 없었어. 용돈을 준 적이나 있어? 손에 꼽혀! 중학교 들어갔을 때 한두 번. 그나마도 아예 끊겼지만. 언닌 다 까먹었어? 아부지? 난 싫은 소리 몇 번 듣고, 몇 대 맞고 말지, 가난한 건 싫었다고! 돈 없어서 쪽팔린 거! 애들이 날 얼마나 무시했는 줄 알아? 구두닦이 딸이라고!
수희 : 넌 아직도 집 원망만 해!
수남 : 날 이렇게 만든 건 집이야!
수희 : 뭘 어떻게 했는데?
수남 : 봐! 안 보여? 안 보이냐고?
수희 : 뭐든 집 탓으로 돌리지 마!
수남 : 대물림시키고 있잖아! 너만 봐도 그래! 집구석이 너무 싫다며! 안 그랬어? 궁상 떠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며! 그래서 서울로 대학 간다고, 머리 싸맸잖아? 성공해서 우리 집처럼은 안 살 거라고? 근데 왜, 그랬던 니가 니 애를 그렇게 키우고 있는데! 똑같이! 난 너처럼은 안 살아!
수희 : 그래서, 넌? 이렇게 되기 싫어서 어떻게 했니?
수남 : 야! 니 등록금 누가 냈는데! 엄마가 냈다고? 아부지가 냈다고? 내가 냈어! 내가 냈다고! 그렇게 더러우면 받질 말았어야지!
수희 : 알았으면 안 받았어!
수남 : 아하? 몰랐다고? 너, 나 스물두 살 때 술 처먹고 나한테 뭐라고 했어? 더럽다고 했잖아! 안 했어? 안 했냐고?
수희 : 말다툼이었겠지.
수남 : 당장이라도 아부지가 머리끄덩이 잡을 줄 알고! 다리 몽당이 뿌러질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 줄 알아? (웃고) 근데 너무 조용한 거야. 하루, 이틀, 삼 일이 지나도! 그런데 한 달 지나니깐 니 등록금 고지서가 날라 오더라. 그때 알았어. 너 학교 일 년 더 다녀야 졸업이란 거.
수희 : 니가 보태준 건 고맙게 생각해, 나도.
수희, 음식 쓰레기들 정리한다.
수남 : 니 성격에 그때 왜 가만히 있었겠어? 내가 주는 돈 때문이겠지!
수희 : 내가 몸 팔라고 등 떠민 적 있어? 돈 벌어오라고 강요한 적 있어? 왜 모든 걸 우리 탓으로 돌려? 피해자인 척하면서, 뒤로 숨지 마! 객관적으로 생각하란 말이야. 니 인생은 니가 살았던 거야. 다른 사람이 아니고, 그냥 너라고. 니가 선택한 거니깐!
수남 : 그럼 넌 뭘 선택했는데?
수희 : 난 평범한 삶이지! 물론 니가 집에 많이 보탠 거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이 널 망친 건 아니야.
수남 : 아부지 아플 때도. 엄마는 알고 있었어! 그런데, 수술비? 내가 돈 갖다 줄 때마다, 엄마 입에는 경련이 일었어. 속으로는 날 잔뜩 혐오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억지로 참으면서! 돈이 필요하니깐. 내가 그렇게 버는 돈이라도! 이게 내가 선택한 거야?
수희 : 우린 가족이야. 알았으면 모른 척 할리가 없잖아! 너는 십 년 가까이 우릴 속였어! 속인 건 너야. 뻔히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다녔잖아! 그런데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단 말이야?
수남 : 알게 된 지 꽤 됐잖아!
수희 : 그때마다 넌 딱 잡아뗐지!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또 거짓말을 늘어놓고. 설마 설마 했지만, 니가 너무 완강하니깐!
수남 : 너 때문이야!
수희 : 억지 부리지 마!
수남 : 돈은 내가 다 대는데, 다들 날 무시했어, 너처럼 되지 못한다고.
수희 : 아무도 너한테 돈을 벌어오라고 하지 않았어!
수남 : 하지 않았지만, 모두 내 돈으로 먹고 살았지. 엄마 집도 따지고 보면 내 꺼야. 근데 왜 니가 팔아먹어? 옷이고, 가구고, 다 내 아래에서 나온 거라고……. 근데도 밥상 앞에서 꿈쩍도 안 하더라. 너 안 왔다고. 난 뻔히 옆에 붙어있는 데도! 너는 더 심해! 명절 때 얼굴 한 번 찍 보여주고, 살림살이 하나씩 쏙쏙 빼갔지. 참, 그리고 그때 너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내가 쓴 수건은 절대 안 쓰더라. 무슨 병이나 옮겨?
수희 : 그건 네 피해의식이야. 난 기억도 안 나.
수남 : 아부지도! 똥은 내가 다 치웠더니, 밥은 너한테 먹으려고 그러더라! 너 그 건달 같은 놈이랑 살림 차리고, 연락 안 될 때. 밤에는 병원비 벌러 뛰어다니는 데도! 죽을 때 되니깐 니 이름만 불렀어!
수희 : 제발. 네 멋대로만 기억하지 마. 아무도 너랑 나랑 비교하지 않았어. 비교한 건 너 혼자뿐이라고. 니 청춘을 나한테 다 갖다 바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왜 그래, 대체!
수남 : 자꾸 생각나는데 어떻게 해? 생각날수록 악이 받치는데, 엉?
수희 : 엄마한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 이게 나한테 복수하는 거니? 그래서 대뜸 네 몸부터 망가뜨리려고 하니?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애 낳아서 너랑 똑같이 키우려고? 엄마랑 내 앞에서 너처럼 망가져 가는 애를 다시 보여주려고, 또?
수남 : 내가 낳든 말든, 니들이 무슨 상관이야? 난 낳아도 되냐고 물어보러 간 게 아니야. 그냥 그렇다, 알려주러 간 거지!
수희 : 다들 불행해져! 대물림은 니가 하고 있다고!
수남 : 왜, 내 아이까지 더러울 것 같아? 엉? 날 더럽게 여기니까, 내 아이까지 그렇다고 치부해 버리잖아!
수희 :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수남 : 그럼 뭔데!
수희 : 너만 상처받을 뿐이니까! 거기서 만난 남자가 별 거 있어? 재미만 보고 널 버릴 거야! 틀림없이! 그런데도 낳겠다고, 일 년 만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애를 뱄다는데 뭐라고 해줄까? 축하라도 해줘?
수남 : 그 남자랑 평생 잘 해보겠다는 생각, 애초부터 없었어!
수희 : 근데 왜 고집이야! 지워, 지우라고!
수남 : 그냥 애를 키울 거야. 나와 다르게! 사랑 듬뿍 주면서,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우겠다고!
수희, 불 끄고, 맛본다.
수희 : 그래, 낳든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 해.
수남 : 그럼 니 마음대로 될 줄 알았어? 당장 나가. 눈앞에서 꺼지라고!
수희 : 맛있네. 먹어. 갈게.
수남, 냄비를 손으로 친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냄비.
수남 : 니가 더 더러워! 고상한 척 좀 그만 해!
수희 : 이런 상황에서 낳은 애가 너처럼 안될 것 같아?
수남 : 괜찮아, 얜. 언니가 없으니깐!
수희 : 그래, 임신 축하한다.
수남 : 평생 옆에 붙어서 엿 먹이는 너 같은 애만 없으면 돼! 너만 없었으면 모든 게 달라졌을 거야! (쳐다보고) 너 때문에 난……!
수희 : 꼭 그렇게 해 줘. 나처럼 고생만 시키지 말고.
수희, 옷 입는다.
수희 : 아버지, 마지막으로 나 불러서 뭐라고 하셨는 줄 알아?
수남 : 왜, 예언이라도 했어,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수희 : 너 좀 챙겨달래. 너 걱정된다고, 해준 거 없어서 미안하다고, 너 좀 챙기라고 그 한 마디만 딱 하고 가셨어.
수남 : 웃겨, 진짜.
수희, 현관문 열고,
수희 : 옷 좀 두껍게 입어. 밖에 눈 왔다. 참 김치, 베란다에 놔. 빨리 쉬겠다.
수남 : 유산됐어.
수희, 돌아보면.
수남 : 유산됐다고, 나……. (짧게 웃고) 민준씨랑도 헤어졌어, 완전히 끝났어……. 다 끝났어!
수희 : ….
수남 : 성병이래! 내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 알아? 클라미디아?
수희 : 수남아…….
수남 : 몰라? 알잖아! 넌 똑똑하니까 다 알잖아!
수희 : ….
수남 : 왜, 그런 얼굴이야? 웃어! 웃으라고! 니가 원하는 대로 다 됐잖아, 다!
수희, 현관문에 붙은 배달음식 스티커 하나하나 다 뗀다.
수희 : 이런 거 좀 먹지 마.
수희, 엎질러진 냄비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수희 : 엄마한테는 말 안 할게.
수남 : 왜? 당장 알려 주지, 엄마 소원 풀었는데! 춤이라도 추겠네!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겠지!
수희 : ….
수남 : 왜, 너무 기뻐서 말도 잘 안 나오냐?
수희 : 내일 전복 사서 올게. 며칠이고, 몇 달이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약간 메여) 전복 많이 먹으면 돼. 그럼 돼.
수남 : 사오지마! 안 먹어, 더러워서!
수희 : 더러워도 먹어. 갈게.
수희, 나간다.
수남, 요를 얼굴에 푹 뒤집어쓴다.
잠시 후, 일어나서 바닥에 엎질러진 죽 손으로 찍어 맛을 보고,
수남 : 뭐야, 맛도 더럽네…….
냄비에 남은 죽을 계속 떠먹는다.
수남 : (목 메여) 죽 하나 못 끓이면서 왜 왔어…….
남은 냄비 긁어 마시다시피 하다가, 엉엉 울고 만다.
천천히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