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요? TV도 안 봤어요. 보면 미칠 것 같아서요.”

2년 연속 한국프로야구 정상에 선 SK 와이번스. 모두가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팀 동료들의 환호성을 애써 외면했던 선수도 있었다. 오른손 투수 엄정욱(27).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선수였다. 지난 2003년과 2004년 두 차례 시속 158㎞를 던졌다. 아직까지 한국 최고 기록이다. 전지훈련 때는 161㎞를 찍은 적도 있다. 제구력이 들쭉날쭉 했지만 SK구단은 그에게 ‘와일드 씽’이란 별명을 붙여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 팬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에 그를 소개하는 대형 광고판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을 코앞에 둔 지금 엄정욱을 기억하는 팬은 많지 않다.

“허, 제가 언제 스타였습니까? 기억도 안 납니다. 제 팬은 하나도 없을걸요?”

크리스마스 전날 인천 문학구장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만난 그의 얼굴엔 냉소(冷笑)가 흘렀다. 함께 운동하던 후배가 “4년 전에 정말 대단한 스타였다”고 거들자, “다 지난 일”이라며 말허리를 잘랐다.

“여기 훈련장 벽이 하얗잖아요. 4년 동안 이 흰 벽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말 ….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죠.”

엄정욱을 망가뜨린 건 부상. 2004년 105와 3분의 1이닝을 던진 뒤 탈이 났다. 2년을 고생하다가 결국 2006년 10월엔 팔꿈치, 그리고 지난해 1월엔 어깨에 각각 칼을 댔다. 작년엔 아예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돼 선수생활을 잠시 중단했고, 올해도 꼬박 1년을 재활에만 매달렸다.

“내년에도 안 되면 잘리겠죠. 사실은 올해도 잘릴 뻔했었어요. 공 한 개 안 던지고 연봉 받는데,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아웃이죠.”

2009년이 마지막 기회라는 엄정욱은 현재 자신의 몸 상태가 “80% 정도”라고 했다. 얼마 전 피칭을 시작했다가 다시 팔꿈치에 통증을 느껴 잠시 중단했다. 처음 기자에게 “엄정욱이 좋아, 내년엔 기대해도 괜찮을 거야”라던 김성근 감독은 통증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걱정이 태산이다. 감독의 근심 어린 얼굴에 엄정욱은 “괜찮습니다. 전지훈련 캠프에 들어가면 몸 상태를 100%로 끌어올리겠습니다”라며 안심을 시켰다.

“볼 스피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안 아프고 제대로 공을 던지는 것, 팀에 보탬이 되는 것이 중요하죠.” 비슷한 시기에 수술받은 동기생 이승호가 올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 더 비교가 되고 있다는 엄정욱.

“4살 차이 여자친구 얼굴을 봐서라도 정말 내년에는 재기해야 합니다. 제게 많은 힘을 주고 있는데 빨리 데려와야죠.” 문학구장 관중석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