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끝자락의 서해, 거칠다. 배를 삼킬 듯 일렁이는 파도에 두려움이 느껴진다. 아침 8시, 어둠이 가시지 않은 부두 위 하늘에선 굵은 빗줄기가 사선으로 쏟아진다. 심상치 않은 바다. 작은 쾌속정에 몸을 실었다.

말도(唜島)를 아시나요? 강화도 외포리에서 북쪽으로 30km, 전체 면적 1.449㎢, 여의도의 6분1 밖에 되지 않아 웬만한 지도에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작은 섬.

그러나 이 섬은 대한민국 국토의 맨 위 서쪽 끝으로 155마일 휴전선이 시작되는 곳이다. 북한의 황해도 연백지역과 마주보고 있는데, 거리가 불과 6km, 바닷물이 빠져 뭍이 드러나면 이마저도 2km로 줄어든다. 남북 대치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섬. 철책 없이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이 시작되는 척박한 섬을 생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총 8가구 13명의 민간인과 20여명의 해병대원들이다.

강화도 외포리를 떠난 행정선이 파도를 가르며 내달린 지 한 시간여. 주문도에 기자를 내려놓고는 순식간에 해무(海霧) 속으로 사라진다. 이번엔 더 작은 쾌속정으로 옮겨 타고 말도로 떠났다. 그렇게 두 시간을 더 가자 해무 사이로 검푸른 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출렁거리는 배에서 뛰어내려 섬에 오르자 ‘바지직’ 굴 껍질 깨지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날, 말도 주민들의 모습.

선착장부터 시작된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오르니 최전방인 해병대 말도 진지에 다다른다. 8가구는 작은 마을에 모여 살고 있었다. 양철지붕을 이고 있는 파란 대문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문 안을 들여다보니 배를 갈라 손질한 망둥어와 송어가 줄에 널려 있었다.

낯선 이의 기척을 느끼셨는지 안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다. 말도에서 나고 자라 이곳 해병들 사이에서 ‘말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근동(70) 할아버지다. 군 생활을 빼곤 말도를 떠난 적이 없다고 하신다. “50년쯤 됐지. 군대 때문에 뭍에 나갔다 결혼하고, 애 낳아서 돌아왔으니까. 안 오려고 했는데, 향수병인지 고향 생각이 자꾸 나서 돌아왔어.”

옆에서 커피를 타던 할머니 이순심 씨가 한마디 거드신다. “아이고…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양반이 강화도 간 데서 남편 가는 덴 다 좋다고 따라 왔는데 말도 말어. 와보니 여기야. 매일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리지, 군인양반들 훈련한다며 총소리 나지…. 해 지고 나면 무서워서 뒷간도 못 갔어. 미리 이런 덴지 알았으면 이 양반하고 결혼 안 했지.”

할아버지는 “여기 얘기 미리 하면 당신이 결혼 해줬겠어?”하며 웃는다. 할아버지가 말도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참 오래된 동네야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때는 여기가 귀양 살던 데였어. 한번 들어오면 못나가는 동네라 (이 섬으로) 보냈던 모양이야. 지금도 뻘이나, 산 속엔 그때 쓰던 깨진 그릇이며 도자기들이 있어.”

할아버지는 말도가 한때는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돈이 모이던 데였다고 했다. “일정 때만 해도 86가구 정도 살던 꽤 큰 마을이었지.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어서 고깃배며 젓갈 배, 무역선까지 여기서 꼭 한번은 쉬어갔어. 내가 코흘리개 때만해도 여기 선착장 앞이 죄다 기생집일 정도였어. 뱃사람들 바다에서 번 돈 뭍에 가기도 전에 여기 기생들한테 몽땅 털렸어. 기생들 덕에 부자동네가 됐지. 다 옛날이야기지 뭐….”

자식들이 있는 뭍에 나가 살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사람은 나고 자란 데서 죽는 게 행복한 거”라며 웃는다. 민통선 안이라 말도 주민들은 배를 가질 수 없다. 농사와 낚시로 거의 자급자족하는 생활. 할아버지는 “해병대 장병들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농사짓는 것을 도와줘서 살 수 있었다”며 그들에게 감사하단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선착장 방향으로 높게 서있는 첨탑 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흰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회색 시멘트 속살이 드러난, 폐교를 개조한 이 섬 유일의 교회, 말도등대교회. 이 교회 전광연(30) 전도사가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다. 충청도 제천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1년3개월 전 말도로 들어왔단다.

“처음 이곳을 둘러보고 제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났어요. 아내가 오히려 힘을 주더군요.” 지금은 감사한 마음이 크단다. “‘사소한 것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알게 됐어요. 부족하기에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간단한 진리를 여기 와서야 이해하게 된 거죠.”

돌아가는 길. 막 배추를 뽑아 배추 잎이 널린 밭을 정리하던 강을구(64)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두 달 전 인천 부평에서 이곳으로 온 말도 새내기다. 아는 동생이 우연히 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가 눌러 살게 됐단다.

“대한민국에서 여기만큼 물 좋고, 공기 좋은 델 못 봤어. 지금껏 고생만 했는데 이제 나도 쉬어야지. 얼마 전엔 마누라도 설득했지. 1월이면 여기 와서 살겠데.” 생애 첫 농사였던 배추가 생각 이상으로 풍작이었다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해병대 진지는 조용한 마을과 달리 분주하다. 사격 훈련장으로 장병들을 따라 나섰다. 바다를 향해 K-3 자동소총과 K-2 소총이 불을 뿜는다. 지휘관인 박래송 중위는 “총구를 들고 쏘면 탄환이 북한까지 날아간다”며 연신 주의를 준다.

스물다섯 살인 그는 대한민국의 최전선, 휴전선이 시작되는 곳을 책임지는 말도 소초장이라는 무거운 임무를 맡고 있다. 지난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올 1월에 부임해왔다. 격오지 소초장으로 뽑혀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며 미소를 짓는 그에게 말도는 어떤 곳일까?

“제게는 집이죠. 스무 살 전후인 장병들 중 장교는 저 혼자예요. 계급을 떠나 때론 투정을 받아주는 형, 때론 고민을 들어주는 삼촌 역할을 하며 사는 곳입니다. 외딴 섬에 떨어져 있으니 다른 부대보다 훨씬 더 끈끈하지요. 10년 전 이곳의 진지장을 했다는 선배가 얼마 전 전화를 했어요. 이곳이 너무 그립다고. 30년 전에 이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며 다시 한 번 와보고 싶다고 전화하는 분도 있지요. 저도 그분들처럼 이곳을 그리워하겠지요.”

그는 요즘 북한과 말도 사이를 오가며 조업하는 중국어선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그와 이야기를 끝낸 후 막사 안 휴게실에서 오민제(23) 상병을 만났다. 고2 때부터 운동을 했다는, 보디빌딩 선수를 연상시킬 만큼 울퉁불퉁 근육질의 몸. 아령을 들 때마다 이두근과 가슴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2007년 8월, 말도에 왔다는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어머니가 암이세요. 입대 직전에 위암 3기 판정을 받았어요. 그런 어머니를 두고 훌쩍 떠나면서 죄인이 된 듯 했죠. 거기다 외출·외박조차 안 되는 이렇게 외진 말도로 들어 왔을 땐 참 원망스럽고, 괴로웠죠.” 지난 10월 어머니의 병세가 급속히 회복됐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말도에 온 이후 가장 행복한 소식이에요. 제겐 말도가 희망을 안겨준 데에요.”

막사를 나와 초소로 갔더니 제대 두 달을 남겨둔 김홍주 병장과 입대 7개월 차 서준석 일병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초소의 기온은 섭씨 영하 15도. 초속 17m의 칼바람이 피부를 쓸고 지나며 살점을 뜯는 듯한 고통을 남긴다. 이곳에서는 망원경 없이도 북한 땅 연백의 흰 염전과 건물, 논, 밭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저기 보이는 건물들은 다 사람이 살지 않는 위장 건물이에요.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라며 김 병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신 일병이 바짝 긴장해 있다. 그는 강화도에서 근무지원을 나온 상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막막했는데 지금은 좋아요. 언제 이런데 와보겠어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델 일부러 찾아 다니는 세상인데, 여기만큼 순수한 자연도 없는 것 같아요.”

그는 말도만큼은 언제까지나 지금 같았으면 좋겠단다. 이곳 말도는 누구든 성숙하게 만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