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스물 두 살 전태일(全泰壹)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 자살했다. 숨이 끊어지던 병상에서 그는 부탁했다. "엄마, 해보려고 해도 안 돼서 내가 죽는 거예요. 연약한 노동자들이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아들의 뜻을 이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이소선(李小仙)씨가 이달 팔순을 맞았다. 지난 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잔치에는 600명이 참석했다. "팔순 잔치 안 하겠다고 계속 얘기했어. 서민들 형편이 엉망이 됐는데 무슨 팔순을 챙겨.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 정성을 뿌리치기가 힘들더라고."

지난 8일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기념사업회 건물에서 만난 이씨는 아들 얘기가 나오자 담배를 피워 물었다. "태일이 얘기를 하다 보면 미쳐버려. 한번 얘기를 하면 사흘은 아파서 누워있어야 해."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이씨는 밤마다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시위 도중 경찰에게 얻어맞았던 자리가 수시로 쑤신다. 날이 추우면 통증이 더하다. 당뇨에 혈압과 백내장까지 겹쳐 매끼 세 주먹씩 약을 삼켜야 한다.

"아파서 혼자서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숨 붙었으니까 살고 있는 거지 뭐." 걷는 것도 불편해 5분 거리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까지 가는데 5번을 쉰다. 이씨는 유가협 초대 회장을 지냈다.

전태일이 분신하던 날, 이씨는 구역예배에 나갔다. 하루 전날 아들은 유난히 간절하게 "내일 1시에 평화시장 구름다리 있는 데로 나오세요"라며 부탁했다. "그냥 와서 보기만 하면 된다"며 붙잡았지만 "데모하는데 내가 왜 가냐"면서 안 가겠다고 했다. "예배를 보러갔는데 사람들이 '큰일 났다'며 부르러 오더라고. 집으로 가다 국수가게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태일이가 분신한 걸 알았어."

와룡산 바위틈을 뚫고 나온 콩이 사방에 흩어지는 태몽을 꾸고 나온 아들이었다. 꿈 속의 신선은 "이 콩이 세상에 퍼져 열매를 맺어야 모든 백성이 먹고산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을 알아야겠다며 법전을 공부하다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 하던 아들. 차비로 풀빵을 사 어린 여공들에게 나눠주던 아들. 그 아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엄마, 배가 고프다"였다. 죽어가는 아들 곁에서 이씨는 가슴을 쥐어뜯다 정신을 잃었다.

전태일 사망 직후 "이 돈이면 대대손손 배부르게 살 수 있다"면서 정보기관이 무마조로 내민 거액을 이씨는 거부했다. "내가 그 돈을 받아먹으면 우리 태일이 피를 파는 거야. 아들 피를 팔아서 엄마가 살 수 있겠어? 그 돈 받았으면 나는 오래 전에 죽었을 거야." 분신 항거 2주 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전태일은 옷장사를 하던 남편 전상수(全相洙)씨와 결혼해 낳은 장남이었다. 옷 수선집 작업대 위에서 낳은 둘째 아들 전태삼(全泰三·58)씨는 현재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한다. 그도 형을 따라 노동운동을 하다 징역도 살았다. 잠시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IMF 외환위기 때에 문을 닫았다.

셋째 전순옥(全順玉·54)씨는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자와 그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을 위한 투쟁'이 학위 논문이었다. 2001년 성공회대 교수로 임용됐으나 "봉제 노동자들이 고급 기술과 브랜드를 가지고 사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면서 교수직을 버리고 창신동에 공부방을 열었다. 유학 중 만난 영국인 남편 크리스토퍼 조엘(65)씨도 순옥씨를 돕고 있다.

막내 전순덕(全順德·50)씨는 "오빠와 언니가 노동운동에 미쳐서 활동하고 있으니, 나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면서 은행에 다니다 지금은 전업주부로 지낸다. 남편 임삼진 전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지난 6월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에 임명됐다. 이씨에게 "사위의 청와대행을 찬성했느냐"고 묻자 "그런 건 물어보지마"라며 말을 잘랐다.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여자로서 이씨의 삶에 굴레는 아니었을까.

"내가 태일이 엄마라서 노동운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태일이가 죽고 나서야 어린 노동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환경에서 일하는지 알게 됐지. 풀빵 하나 먹고 물로 배 채워 한 끼 때우고, 하루 16시간 일하면서도 월급 3000원조차 제대로 못 받는 애들의 고통을 그제야 알게 됐어.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이 오는 걸 보려고 싸우다가 39년이 지난 거야."

아들이 불탄 자리에서 '노동자의 어머니'가 돼 다시 일어선 이씨는 3번이나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내가 글이라도 알았으면 법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 투쟁하진 못했을 거야. 무식이 무기였지. 잡혀가서도 '죽이려면 죽여라'하고 대들었어. 정보부 사람들이 '고춧가루 물맛 한번 봐야겠다'면서 양동이에 물 붓고 고춧가루를 타길래 발로 차버렸지. 약자라고 벌레 취급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냐. 사람이 아닌데 내가 왜 무서워해."

이씨는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웠다. "건강도 좋지 않은데 안 끊으시냐"고 묻자 "아들 생각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참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담배를 피우면 그 순간에는 견딜 수 있으니까…."

이씨는 장남 전태일이 죽기 전 만들어준 내복을 아직도 입는다. 공장에서 남은 분홍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옷은 40년 세월을 지나며 색이 바랬다.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가 이씨에게 넘긴 인세로 근근이 생활해 왔으나 책이 절판되면서 약값 내기도 힘들어졌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후원회비로 운영하고 있으나 불황으로 회원들이 빠져나가면서 형편이 많이 나빠졌다.

"난 잘한 게 없어. 빈부격차가 줄길 했나, 비정규직이 없어지길 했나. 1980년대에는 '그날'이 오리라는 희망이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그 희망도 시들었어. 서민들이 갈수록 힘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고난의 산을 넘고 넘으면 언젠가는 바다가 보일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제는 그 기대가 없어지니까 몸도 더 아파."

이씨는 노동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으면 안 돼. 죽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서 싸워. 나는 아들 죽고 나서 이 가슴에 묻고 밤이고 낮이고 가슴이 아파서 죽겠는데, 죽으면 그 부모들은 또 어떻겠어."

요즘 들어 이씨는 지인들에게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살아봐야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겠어. 같이 싸우고, 같이 얻어맞고, 같이 울었던 그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어. 도와준 사람들 모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