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고분 발굴조사 결과를 담은 ‘울릉도’가 발간됐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이 1963년에 낸 고적 조사보고서 ‘울릉도’에 이후 발견된 유물 451점의 기록을 추가했다. 울릉도에서 출토된 토기 산지 분석과 유리옥 성분 분석 결과, 일제강점기에 채집된 유물 등을 부록으로 실었다.
중앙박물관은 1957년,1963년 조사에서 울릉도 고분 87기와 고분의 축조 시기가 주로 통일신라시대임을 밝혀냈다. 도굴, 개발 등으로 고분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고분의 분포상과 축조 방식을 조사하고, 출토 유물을 통해 시간적 위치를 밝힌 최초의 시도였다.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4(지증왕 13년·512)에 있다.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 사람들을 무력으로 복속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 계략을 세워 항복시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기록을 통해 최소한 6세기 이전 울릉도에 우산국이라는 정치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릉도는 태조 13년(930) ‘고려사’ 에 다시 등장한다. 울릉도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이고, 그 시대에 가장 문화가 융성했음에도 이 시대에 해당하는 옛 문헌상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울릉도는 오로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만 짐작할 뿐이다.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경주계 신라토기, 횡혈식 석실분 등 경주 중심의 신라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신라문화는 지방마다 본래 존재하던 문화와 결합해 독특한 지방색을 띠게 된다.
울릉도도 마찬가지다. 무덤과 토기에서 울릉도만의 특색을 보인다. 울릉도에서 발견되는 적갈색·회청색 토기는 경주에서 만들어진 토기와 모양은 같지만 흙이나 색상 등에 차이가 있다. 무덤 역시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는 횡혈 횡구식 석실분과 달리 축대를 쌓고 돌로 봉분을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중앙박물관은 “울릉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분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울릉도는 신라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일정 부분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울릉도’는 기록이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울릉도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 고적조사보고서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