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말 때문에 아침마다 울어요. TV 드라마 때문에 승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제가 덩치가 좀 있잖아요. 제가 타면 말이 주저앉거나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힘들어해요. 말에게 너무 미안해서 차라리 제가 말을 태우고 달렸으면 좋겠다니까요."
연극, 영화, TV 드라마를 넘나들며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 고수희(32)씨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또 그 '덩치' 얘기다. 키 171㎝에 당당한 체격 때문에 '뚱뚱한 여배우' '연기파 배우'란 말을 하도 자주 들어서 "기자들에게 그것 말고는 물어볼 게 없느냐고 항의한 일도 있다"고 했다.
살짝 웃는데 눈매가 익숙하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바람난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온 마녀의 사나운 얼굴이 떠오른다.
"그 마녀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강렬한 역만 들어와요. 사실 전 멜로드라마를 하고 싶거든요. 제가 진짜 마음이 여려요. 하지만 어떻게 해요. 배우니까 뭐든 다 해내야죠. 저도 말에 훌쩍 올라타고 담도 단숨에 넘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 속상하죠."
고씨는 1999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한 후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야끼니꾸 드래곤' 등 연극 20편과 영화 10편에 출연했다. 그는 원래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엄마가 동대문과 남대문 새벽시장에서 옷을 팔아 저희 3남매를 키웠거든요. 저도 크면 엄마랑 옷장사나 하려고 했어요. 안양예고와 대구예술전문학교를 다녔지만 연극이 제 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첫 직장에서 텔레마케팅을 하다가 임금도 못 받고 그만두고 이어 들어간 아동극단에서도 허드렛일을 하다가 역시 보수를 받지 못해 그만둔 후 또 다른 극단에서 일을 하게 됐다. 아동극단에서 만나 친구가 된 박해일(영화배우)씨가 "노느니 장독 깬다고 대학로에서 포스터나 붙이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그곳에서 박근형 연출이 고수희, 박해일에게 '청춘예찬' 대본을 건네며 한번 해보자고 했다. 4년째 고등학교 2학년생인 청년과 무능한 아버지, 아버지가 끼얹은 염산 때문에 눈이 먼 어머니, 청년의 아이를 가진 뚱뚱한 '간질'이 등장한다. 고씨는 이 우울한 '간질' 역할을 맡았다. '청춘예찬'은 연장 공연을 거듭하며 온갖 연극상을 휩쓸었다. 고씨의 우연한 데뷔작은 성공작이 됐다.
좋은 배우가 되는 데 필요한 세 요소를 들어보라고 했더니 "타고난 재능, 이끌어줄 연출, 지원해줄 팬"을 들었다. 그의 연기력을 받쳐주는 또 하나의 힘은 '취재'다. 어떤 역을 맡으면 먼저 자기 속에서 그 역할에 맞는 감성을 끄집어낸다. 그렇지 못할 땐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람을 인터뷰한다. 그때 상대의 표정과 눈빛을 연구한다.
"저에게 연기란 어느 날 툭 던져진 일이었기 때문에 배우로 산다는 것이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젠 그동안 쉽게 해온 일이 이유 없이 힘들어서 벽에 부딪힌 기분이 들거든요. 요즘 극단후배들을 보면 지방도시에서 와서 청소도 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 배우가 되겠다고 고생해요. 그런 걸 보면 저는 저런 어려움을 몰라서 좀 더 성숙하지 못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일본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재일교포 가족 이야기를 그린 '야끼니꾸 드래곤'은 고씨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을 만들어줬다. 이 연극은 예술의전당과 일본의 신국립극장이 각각 개관 20주년과 10주년을 기념해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고씨는 이 연극을 통해 일본으로 활동무대로 넓혔고 더 큰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기쁨을 알게 됐다.
"작년 연출가 워크숍에서 일본연출가와 공연을 했는데 통역 없이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8개월 동안 밤을 새우며 공부했는데 일본서 연극을 하게 된 거예요. 한·일 양국에서 호평을 받았죠. 양국 배우와 스태프 모두 목숨 걸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연습 분위기가 작품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말이 맞더라고요."
일본 관객들은 대개 냉정하리만치 아무런 표현이 없다. 신기해서 이유를 알아보니 "옆에 앉은 사람의 집중상태를 방해해 폐를 끼칠까 봐 조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야끼니꾸 드래곤'을 본 일본관객들은 웃고 울고 박수를 쳐서 일본 배우들이 더 놀랐다. 매회 기립박수가 터졌다.
일본 여배우가 무대 뒤로 찾아와 고씨에게 "당신은 천재다. 꼭 같이 자매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2010년 일본에서 세 자매 이야기를 그 배우와 함께 공연하게 됐다.
고씨는 "연극의 매력은 상대 배우를 알아가는 것 그리고 공연 끝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공연 후 관객 앞에 서면 마음속으로 '밤 공연에 와서 이 힘든 의자에서 버티며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