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 광서제(光緖帝)가 독살(毒殺) 당해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일 보도했다. 광서제는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청나라의 11대 황제였던 인물.
문회보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100년 수수께끼를 풀다. 광서제가 비상(砒霜·비소로 만든 극약)으로 독살 입증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청나라 말기의 광서황제의 사망 원인에 대해 ‘정상적으로 병사(病死)했다’는 설과 ‘음모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이 많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었는데, 그의 사망 100년 기일(忌日)을 며칠 앞두고 과학기술에 의해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보도했다.
문회보는 “중국의 국가중점문화공정팀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에서 독극물 화학실험 결과, 광서제의 모발과 위(胃)에서 치명적인 분량의 비소 성분(예전엔 비상·砒霜으로 불림)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국가 청사(淸史·청나라 역사)편찬위원회’가 금명간 ‘청(淸)광서황제 사인 보고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자연사가 아닌 독살로 확인됨에 따라 과연 누가 독살에 가담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의문이 새로 생기게 된 것.
1871년 8월14일 태어난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저녁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바로 그 다음날 서태후(慈禧太后)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하루 사이에 나이 차이가 두 배인 두 핵심 인물이 죽자 세상에는 추측이 난무했다.
어떤 이는 “서태후가 자신이 죽은 뒤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아 사람을 보내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환관 리롄잉(李蓮英)이 독을 탔는데, 그 이유는 광서제가 자신의 일기장에 ‘서태후가 죽고 나면 위안스카이와 리롄잉을 주살할 것이다’고 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광서제가 신체가 허약해 병사했다”고 말한다. 지난 100년간 광서제의 사인에 대해 장황하고 지루한 논문은 많았지만 정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중국 국가문물국이 1930년대에 도굴된 채 방치됐던 유물들을 정리하다가 청서릉(淸西陵)의 창고 안에 있던 광서제와 융유(隆裕)황후의 관과 유해를 찾아냈다. 이후 두 사람의 모발과 유해를 추출해 최근 5년간 고도의 과학실험을 거쳤다.
곧 발표될 ‘광서제 사인 보고서’에는 최신의 법의학적 실험을 한 청서릉문물관리처, 중국 원자력연구원, 베이징시 공안국 법의(法醫)감정센터 관계자들이 서명했다. 이들이 최후에 낸 결론은 “광서제의 모발에서 높은 함량의 비소가 검출됐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감염된 것이다. 다량의 비소화합물이 광서제 시신의 위(胃)에 잔류하고 있고, 시신의 부패 과정 등으로 인해 유골과 의류 등에도 녹아 내려 분포한다. 과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광서제가 체내에 흡수한 비상(砒霜)의 총량은 치사량에 이르렀음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병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는 중국 정사(正史)도 독살 당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광서제는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유신을 일으켰지만 최종적으로는 수구파와 서태후의 역공을 당했고, 죽을 때까지 서태후에 의해 영대(瀛台)에 감금됐다. 비소 성분으로 이뤄진 극약인 비상은 냄새가 없고 맛도 없는 백색 가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