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最古) 영화관 단성사(團成社)가 부도났다. 우리은행은 24일 "단성사가 19일 우리은행 종로3가 지점으로 들어온 15억원의 당좌수표를 결제하지 못해 23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고 밝혔다.

(본지 9월 25일자 보도)

국내에서 첫 제작된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상영돼 1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후 단성사는 '장화홍련전'(1924년),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 '춘향전'(1935년)을 상영하며 한국 영화의 개척기를 지켰다.

'한국 영화의 요람' 단성사가 23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사진은 2005년 재개관 당시의 단성사 전경(왼쪽)과 1995년의 옛 단성사.

단성사의 전성기는 1960~90년대 초까지다. '역도산'(1965년)·'겨울여자'(1977년)·'장군의 아들'(1990년)·'서편제'(1993년) 등이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당시 '단성사 흥행=전국 흥행'을 뜻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개봉일 관객 반응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왔다.

중년들에게 종로는 추억의 극장 거리다. 1970년대 단성사와 피카디리가 있던 종로3가는 매표구 앞에 장사진을 친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단성사는 세운상가의 국도, 낙원상가의 허리우드, 충무로의 대한과 스카라, 명동의 중앙극장, 광화문 국제극장 등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토종 극장들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킨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관객의 발길이 뜸해졌다. 서울극장만 재빨리 대응했을 뿐, 단성사·대한극장·피카디리·스카라극장은 시대 흐름에 뒤처졌다.

결국 대한극장이 2001년 멀티플렉스로, 피카디리는 2004년 '프리머스 피카디리'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명보극장은 개관 50년 만에 문을 닫고 뮤지컬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허리우드도 극장을 개·보수해 아래층은 영화관, 위층은 공연 전용관으로 운영한다.

단성사는 2001년 재건축에 착수, 단관이던 옛 극장을 총 10개관의 멀티플렉스로 재건축해 2005년 재개관했고, 올 5월부터는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업체인 씨너스와 제휴, '씨너스 단성사'로 영업해왔다. 그러나 재건축에 따른 자금 압박으로 지난해 110억원의 손실을 기록하는 등 2년째 자본 잠식 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단성사 건물 소유주인 건물법인 '단성사'가 부도를 맞은 것이기 때문에 건물에 입주한 씨너스 영화관은 계속 운영된다.

단성사는 101년 역사 동안 많은 비화를 남겼다. 기생들의 연예 공연장으로 출발할 당시 "남녀가 깜깜한 데 모여서 뭐 하는 짓들이냐"는 비난이 쏟아지자 극장 개축 때 부인 전용석을 만들었다.

1970년대 말에는 단성사 뒷골목을 순찰하던 방범대원이 피살되는 등 극장 주변에서 사건이 끊이지 않자 "단성사 터가 세 그렇다"는 말이 나왔다. 단성사 터는 조선시대 의금부 자리로 죄지은 양반들이 고문받던 장소였다. 단성사를 세우기 10여년 전에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이곳에서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