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안드레아 삭스(앤 헤더웨이)는 영화 초반 심각한 얼굴로 신문 스크랩을 들춰본다. '명품은 왜 페미니즘의 적인가?'라는 신문 헤드라인 카피가 화면 가득 스치고 지나간다. 이것은 명품 브랜드를 제목으로 내세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궁극적으로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다. 영화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명품혐오증을 가진 여성을 전면에 등장시킨다. 대학 신문사 편집장을 지낸 안드레아는 경비노조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로 대학생 기자상을 수상한 이른바 지적이고 야무진 캐릭터. 얼떨결에 '런웨이'라는 패션 잡지에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벨트 하나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저 우습고 안쓰러워 보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악마 같은 편집장 미란다 프레슬리(메릴 스트립)의 말단 비서로 일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잡지계의 거물 미란다 프레슬리의 비서직 경력은 이 바닥에서 출세의 지름길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살인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며 안드레아를 신데렐라로 추켜세운다. 그러나 정작 안드레아 자신은 커피 심부름과 전화를 받는 것이 주업인 하찮은 비서직에 크게 만족하지 못한다.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명품혐오증도 끝내 버리지 못한다. '런웨이' 사람들은 촌스럽고 뚱뚱한 안드레아를 대놓고 무시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패션을 숭배하는 그들의 허영심에 콧방귀를 날릴 뿐이다.
안드레아는 옷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는 캐릭터다. 지적인 여성은 옷 따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란다는 패션을 우습게 보는 그녀에게 쓴 소리를 내뱉는다.
"네가 입고 있는 그 촌스러운 블루셔츠는 오스카가 2002년에 가운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거야. 그 후 이브 생 로랑이 같은 색깔의 군용 재킷을 만들어 유행시켰고, 곧 비슷한 색감의 옷들이 백화점과 싸구려 캐주얼코너로 번져나갔지. 패션계와 상관없다는 네가 패션계가 고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 않나?"
그녀는 패션에 무관심한 척 고상을 떨지만, 평생 패션의 찌꺼기를 떠먹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소비지향적인 현대사회에서 패션에 무감각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 이런 현실에서 지적인 페미니스트는 과연 패션에 민감해지면 안 되는 것일까? 명품을 걸치는 것은 진정 진실한 삶을 방해하는 것일까?
안드레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 직접 현란한 실험대에 오른다. 촌스럽고 뚱뚱한 미운 오리새끼에서 화려한 백조로 변신해나가는 과정은 사뭇 흥미롭다. 지미 추 구두와 샤넬 의상을 걸친 그녀는 이제 어떤 사람으로 변하게 될까? 그녀는 애인에게 옷은 변해도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고 강조하지만, 결국 화려한 옷만큼이나 시끌벅적하게 사고방식을 바꿔나간다. 보잘것없는 애인 대신 잘 나가는 프리랜서 작가에게 매혹되고,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고는 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패션에 중독된 여자들을 비웃었던 안드레아는, 명품옷을 걸친 순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허영심 많은 그녀들을 재빠르게 닮아간다.
그렇다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반드시 명품소비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재단하는 건 아니다. 이 영화는 소비지향적인 현대사회에서 패션은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산업이자 개인의 자기 발현 욕구임을 잊지 않고 전해준다. 미란다로 대표되는 명품산업은 안드레아가 '런웨이'를 떠난 후에도 꿋꿋하게 지속된다. 명품에 관한 욕구는 어쩌면 미란다의 주장처럼 "인간의 자기 발현 욕구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런웨이' 편집장인 미란다와 '뉴욕 미러'지 기자로 취업한 안드레아가 눈인사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명품소비가 결국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 문제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명품브랜드를 현란하게 전시하는 이 영화는, 명품소비에 대한 온갖 물음을 안겨준 채 멀미 나는 패션쇼의 막을 내린다.
●더 생각해볼 문제
1. 요즘 우리 사회에 명품열풍이 뜨겁다. 사람들이 명품에 쉽게 현혹되는 이유를 분석하고, 명품열풍이 이 사회에 미치는 경제, 문화적인 영향에 대해 적어보자.
2. 영화는 패션에 문외한이던 안드레아가 명품소비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명품소비는 진실한 삶을 방해할까?" 영화를 보고 이 물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어보자.
3. 명품소비는 개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영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를 나누어 기술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