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초기,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시간, 자본가의 착취와 싸워야 했다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신석기 혁명에서 시작된 농업사회가 공업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새 물결은 19세기 중엽에는 프랑스, 미국, 독일로 퍼져나갔다.

보통 자본주의의 시작을 16세기부터 잡는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본가와 임금노동자가 자유로운 계약에 맺고 생산을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때부터 자본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상품화폐 경제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상품화폐 경제가 널리 퍼졌을 때 자급 자족적인 봉건경제는 끝나고 노동력까지 상품으로 교환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 사회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에 의존해서 생산을 하는 농업사회와 달리 공장에서 자연과 상대적으로 독립해서 생산을 하게 됐다. 이러한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생산력 향상을 가져왔다. 이전 역사에서 인류가 몇 천 년 걸려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생산물을 불과 몇 년 만에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산업혁명에 의한 생산력의 획기적 발전이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자.

기계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대신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개선됐을까?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더 짧은 시간만 노동하고도 더 풍요로운 삶은 유지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전에도 생산은 계속돼왔다. 만약 생산활동이 멈춘다면 인류의 역사도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산을 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크게 보면 고대에는 노예제 사회, 중세에는 봉건제 사회, 근대에는 자본주의 사회였다. 이처럼 생산방식은 다르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생산수단과 직접생산자가 결합해야만 생산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인 토지와 직접생산자인 노예가 노예주인의 채찍 아래에서 결합했다. 노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주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노예에게는 삶을 유지할 최소한의 생활수단만 제공됐을 뿐이다.

노예제 다음으로 봉건제가 이어졌다. 봉건제에서 생산수단인 토지와 직접생산자인 농노의 만남은 노예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분적 강제에 의해 이뤄졌다. 신분적으로 부자유민인 농노는 토지주인인 영주를 위해 강제적으로 노동해야 했다. 농노는 보통 일주일에 3일은 영주 직영지를 경작했고 나머지 4일을 자신의 토지에서 노동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이러한 관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 하나는 토지라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신분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노예나 농노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강제적으로 노동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는 토지라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돼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혼자서는 꾸려나갈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농노는 경제적 목적이 아닌 신분제에 의한 강제 즉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목적 즉 경제적 강제 때문에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했다.

농노의 노동은 자신을 위한 노동과 토지의 주인인 영주를 위한 노동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분리돼 있었다. 3일은 영주를 위한 노동이었고, 4일은 자신을 위한 노동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그러한 분리는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두 과정이 통합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노동도 자신을 위한 노동과 자본가를 위한 노동으로 분리되는 것은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다.

자신을 위한 노동시간이 몇 시간이 될지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빵과 옷, 주택 등 생활수단을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는 데 5시간 노동이 필요하다면, 나머지 노동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8시간 노동을 한다면 5시간은 자신을 위해, 3시간을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 입장에서는 노동시간을 늘려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려 할 것이다.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자본가와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투쟁은 불가피했다. 산업혁명 초기 16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필사적인 투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러나 주요 선진국에서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된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나 가능했다. 힘든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고 생산력의 발전으로 장시간의 노동에서 노동자가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김정 서울대 강사 '국사 시간에 세계사 공부하기' 저자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준 기계의 발명이 직접생산자인 노동자에게는 오히려 축복보다는 재앙이 됐다. 기계의 발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기계를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