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만명. 국민생활체육 전국축구연합회에서 추산하는 국내 조기축구 동호인의 수다. 8월 26일 현재 전국축구연합회에 등록된 조기축구회는 모두 5327개. 8월 들어서만 26개의 시·도, 전국 단위의 축구대회가 열렸고, 9월에도 17개의 축구대회가 동호인들의 땀과 열정을 기다리고 있다. 주먹구구식 뛰고 달리기에서 벗어나 과학적 훈련 방식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팀 전술을 집중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휴가를 반납하고 지방 전지훈련을 떠나 현지 대학 축구부와 실전을 방불케하는 연습 경기를 벌이는 모임도 적지 않다.
인터넷 다음의 '전국 축구클럽 총모임(cafe.daum.net/soxxer)' 카페에는 중국 상하이의 한인 조기축구회가 한국 팀에 한판 승부를 제안하는 게시물이 오르기도 했다. 국민 10명 중 1명이 즐긴다는 국민 스포츠 조기축구. 한국의 조기축구는 어떻게 진화하고 있을까.
축구는 과학이다
무작정 뛰고 달리던 주먹구구식은 더 이상 안 통해
일류클럽 벤치마킹, 철저한 데이터 관리로 전력 극대화
지난 8월 24일 오전 8시. 22명의 남성이 땀을 비오듯 흘리며 서울 강남구 경기고교 운동장을 누비고 있다. 스스로 'A매치'라 부르는 외부 조기축구회와의 맞대결을 한 주 앞두고 삼성 조기축구회의 올드보이(40대 이상 회원)와 원더보이(10~30대)팀의 자체 연습 경기가 한창이다. 형광 녹색 조끼를 입은 원더보이팀이 체력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숨돌릴 틈 없는 공세를 퍼부었다.
"어이, 좀 봐줘! 어른들인데 너무 갖고 노는 거 아냐!"
올드보이팀 선수의 볼멘소리에 그라운드에는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5 대 0. 원더보이의 완승이다. 20분의 미니 축구 게임으로 가볍게 몸을 푼 축구 회원들은 벤치에 모여 앞선 경기를 자체 평가했다. 다음은 전술 훈련 시간. 한상규(42) 감독이 "2 대 1 패스와 협력 수비를 좀 더 가다듬자"고 주문했다. 삼성 조기축구회가 창단된 것은 지금부터 25년 전. 예전처럼 무작정 뛰고 달리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한 관리를 통해 선수 개인의 능력과 팀 전술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최근 조기축구의 모습이다. 요즘은 일류 클럽의 방식을 벤치마킹해 체계적으로 운영된다. "축구할 맛이 난다"는 선수들의 이야기엔 이유가 있었다.
회원들의 유니폼에 그려진 팀 로고가 인상적이다. 두 개의 원 안에 유니콘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한상규 감독은 "안에 있는 원은 가정의 화합을, 바깥에 있는 원은 원활한 사회 활동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유니콘 위에 붙어있는 커다란 별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월드컵 우승국에 주어지는 것과 같은 모양의 별이다. 선수들은 "얼마 전 '강남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뒤 기념으로 별을 하나 박았다"며 "올해 안에 별 수를 2개로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입을 모았다.
짧은 휴식 뒤 연습 경기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올드보이의 분전이 돋보였다. 깔끔한 문전 크로스에 이은 기습적인 슈팅으로 원더보이의 골문이 출렁였다. 원더보이의 GK 안규현(39)씨는 "선수들이 공을 다루는 기술과 슈팅 능력이 예전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정교해져 슛을 막기가 정말 쉽지 않다"고 했다.
데이터 축구의 바람은 조기축구에서도 불고 있었다. 팀의 전술 분석을 담당하는 김대수(44)씨는 경기 내내 사이드라인에 바짝 붙어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기록지를 보니 중거리슛·코너킥·크로스·프리킥·헤딩 등 10여가지 항목에 선수들의 경기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경기 중 선수들의 플레이는 20점 만점으로 환산해 점수화된다고 했다. 감독은 슈팅의 개수, 크로스의 정밀도 등 김대수 분석관의 자료를 토대로 선수들의 빈틈을 정확히 지적하고 보완점을 명확히 드러냈다. 동네 축구식 '대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삼성 조기축구회의 홈페이지(www.samsungfc.kr)에는 회원들의 능력을 기술·신체·정신적 능력의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한 자료가 있다. 정신적 능력은 △공격 위치 선정 △수비 위치 선정 △대담성 △승부욕 △판단력의 다섯 가지로 상세히 기록된다. 자료는 당일 저녁 홈페이지에 올려진다. 선수 평가는 '포지션 변경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최근 훈련 무단 이탈 및 엔트리 제외 등으로 인해 두 선수의 호흡을 볼 수 없다'처럼 구체적이고 냉정하다. 전술 평론을 담당하는 김경태(34·프로그래머)씨는 "평소 프리미어 리그의 시스템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우리 축구회에도 도입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진해서 맡게 됐다"면서 "아마추어 선수들이지만 자신의 플레이가 평가되고 기록되는 것을 원한다"고 했다.
젊은 피 수혈
30·40대 아저씨 부대`→`10대부터 80대까지 고루 참여
아빠 손잡고 온 아이들 위해 자체 유소년팀도 만들어
‘1939년 이전에 출생한 자’.
최근 전남 영광에서 열린 한 축구대회가 내건 자격조건이다. ‘황금부(70대)’로 분류된 이들은 ‘실버부(60대)’와 함께 대회 내내 주목을 받았다. 대회를 주관한 전라남도 축구연합회는 ‘황금처럼 빛나는 70대를 보내시라’는 의미로 황금부라는 이름을 내놓았다. 영광군 축구 연합회의 이경훈(30)씨는 “직접 보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력적인 플레이가 펼쳐진다”면서 “지치지도 않으시는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뒤 시간을 늘려달라는 분도 계신다”고 했다. 작년에는 박종환(70) 전 대표팀 감독이 출전해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을 펼쳐 대회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고 한다. 주최 측은 출전한 70대 회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잔디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도록 했다.
30~40대의 아저씨 멤버들이 주류를 이루던 조기축구의 저변이 확 넓어졌다. 은발을 휘날리는 60~70대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 피’들이 부쩍 늘었다. 전국축구연합회에 등록된 조기축구팀 10개 중 하나는 순수 대학생들로 구성된 팀이다. 유소년축구클럽도 130개를 넘어섰다. ‘차범근 축구 교실’ 관계자는 “최근 한 달에 1000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할 정도”라고 했다.
전국 조기축구팀의 경연장이라 할 수 있는 '아마 월드컵(www.amaworldcup.com)'의 김현건(35) 기획실장은 "불과 1 년 전만 해도 조기축구회에서 젊은 선수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어느 날 보니 대학생이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꿰차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프리미어 리그의 박지성 등 해외 무대에서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이어지며 늘어난 축구에 대한 관심이 젊은층을 조기축구의 장으로 불러 모은 것 같다"고 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그라운드를 찾는 어린이들도 부쩍 늘었다. 삼성 조기축구회는 ‘아이들도 함께 즐기는 조기축구를 만들자’는 취지로 올해 들어 회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자체 유소년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아빠와 같은 백 넘버를 받은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경기를 관람하고 경기장 근처의 미니 구장에서 축구의 기본 기술을 배우는 것. 아버지 박성훈(40)씨를 따라 조기축구를 시작한 현동(9)군은 “아빠한테 발리 슛을 배운 뒤로 친구들과 경기할 때 종종 써먹는다. 오늘은 아빠랑 한 골에 500원 내기를 했다”며 웃었다.
남자만 축구하나
여성들도 축구화 끈 조이고 운동장으로
다음 '축구클럽 총모임'카페엔 90여개 여성축구회
여성들이 가장 지겨워하는 얘기로 남성들의 군대와 축구,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하던 얘기를 꼽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지만 '4강 신화'를 이룬 2002 서울월드컵과 선전을 펼친 2006 독일월드컵을 겪으면서 축구 사랑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여성들의 조기 축구회 바람도 매섭게 불고 있다. 인터넷 다음의 '전국 축구클럽 총모임' 사이트에는 여성 축구 클럽 회원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90여개가 넘는 여성 조기 축구회가 전국 곳곳에 활동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김순아(40)씨는 올초 주변의 친구, 선후배와 함께 여성 조기 축구단을 결성했다. 여성 축구 모임의 배경을 묻자 김씨는 “남자들만 축구를 하란 법이 어디 있냐”고 반문했다. 최근 2기 회원 모집을 마친 부평구 여성 축구단은 매주 화·목·토요일 3일 동안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공을 차고 그라운드를 누빈다. 김씨는 “건강 유지는 물론 골다공증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면서 “뛰고 달리며 다른 생각 없이 운동에만 몰입할 수 있어 훈련을 마치면 스트레스가 싹 가시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회원 모집도 포지션별로
영입 1순위는 골키퍼… 부상 잦고 공격 기회 없어 기피
카페 게시판은 트레이드 시장… 인기 포지션은 주전 경쟁
‘골키퍼를 맡으시는 분께 유니폼을 무료로 드립니다’ ‘우리 팀은 지금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이 가장 급합니다’….
조기축구회 전문 카페인 ‘전국 축구클럽 총모임’에는 회원을 모집하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건 넘게 올라온다. 과거 초등학교 담장에 걸려 있던 회원모집 현수막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한 회원을 모집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팀에 필요로 하는 포지션에 맞는 선수를 구체적으로 구하는 방식이다.
영입 대상 1순위는 어느 포지션일까. 강력한 슈팅 능력을 가진 스트라이커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인력난’이 가장 심한 포지션은 골키퍼다. 조기축구를 찾는 이유 중의 하나가 뛰고 달리며 체력을 키우는 것인데 골키퍼는 공격할 기회가 거의 없고 잦은 충돌로 부상의 위험도 잦아 축구 회원들이 기피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지라 카페 게시판에는 수문장을 애타게 찾는 유혹의 글들이 자주 오른다. ‘골키퍼는 입회비 및 회비 감면 혜택을 줍니다’ ‘골키퍼는 모든 면에서 우대해 드린다’는 식이다. 분당의 조기축구회 ‘송림’의 회원인 대학생 이희준(22)씨는 “인근 지역 조기축구회끼리는 필요한 선수를 일시적으로 트레이드 해서 축구대회에 대비하기도 한다”고 했다.
자신을 트레이드 시장에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학생 김진호(19)씨가 자신 있는 포지션은 미드필더. 김씨는 회원모집 온라인 게시판에 ‘나를 데려가려면 미드필더를 시켜달라’는 글을 올렸고, 미드필더 자원이 부족하던 지역 조기축구회에서 현재 주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김씨는 “지금 조기축구는 한 사람이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며 뛰는 ‘동네 축구’가 아니다. 포지션별로 주전 선수가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유니폼·장비도 최고급으로
싸구려 단체구매 대신 수십만원 축구화도 척척 구입
5만원대 발목보호대 필수품… 축구용 고글도 유행
훈련과 전술의 과학화에 맞춰 조기축구 회원들의 장비 역시 고급스러워지고 있다. 대충 입고 신고 뛰지 않겠다는 것이다. 안산시에서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는 김성진(35)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축구회 회원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싼 단체 구매로 축구 장비를 마련했다. 대충 사이즈만 맞으면 신고 뛰었다"면서 "이제는 발이 편하게 딱 맞지 않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20만원이 훌쩍 넘는 유명 브랜드 축구화를 구입하는 조기축구 회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러닝셔츠에 반바지, 축구화 하나면 해결되던 장비도 다양화됐다. 김성진씨는 "요즘 조기축구 회원들은 자신의 몸을 세분화해서 보호한다"며 "과거에는 정강이를 보호하는 신 가드 정도만 착용했는데 이제는 복숭아뼈를 보호하는 앵클 가드(발목 보호대)가 유행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 조기축구회의 윤종원(32)씨는 최근 5만3000원을 주고 발목 보호대를 구입했다. 가격이 조금 부담은 됐지만 제대로 된 발목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으면 경기에 뛸 수 없다는 감독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윤씨는 "전에는 조기축구하면서 어지간히 다쳐도 예삿일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겼는데 이제는 발목 보호대 같은 장비가 필수품이 됐다"고 했다.
같은 팀의 임성균(42·은행원)씨는 최근 축구용 고글을 새로 구입했다. 조기축구를 즐기며 5개가 넘는 안경을 망가뜨렸다는 임씨는 "저돌적인 플레이를 즐기는데, 축구용 고글을 착용한 뒤로는 플레이가 아주 편하고 좋아졌다"고 했다.
조기축구회 랭킹
전국대회 1~7위까지 인천팀이 싹쓸이
‘부동의 1위’는 32년 전통 남인천 축구회
스포츠 클럽 포털 '빡센닷컴(www.bagxen.com)'은 전국축구연합회가 주관하는 축구대회의 성적을 토대로 조기축구회 전국 종합 순위를 매긴다.
1위부터 7위까지를 인천에 있는 조기축구회가 '싹쓸이'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랭킹 계산에는 조기축구대회의 성적(우승 100점, 준우승 50점, 3위 30점, 참가 점수는 3점)뿐 아니라 각 조기축구회별로 개설된 홈페이지가 얼마나 활발히 이용되는지 여부도 포함된다. '빡센 닷컴' 관계자는 "인천 지역의 조기축구회가 실력 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조기축구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큰 것이 반영된 결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석 달째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인천시 ' 남인천조기축구회'의 회원은 20대에서 60대까지 150여명. 남인천조기축구회의
한원석(42)씨는 "32년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선수들간의 끈끈한 단합이 팀의 원동력이자 좋은 성적의 비결"이라며 "실력이 뛰어난 20대 회원들은 k-3 리그(프로팀과 실업팀을 제외한 순수 아마추어 리그)에 진출시키기도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