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소주는 국민주로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는 황제나 제후가 마셨던 최고급 술이었다. 소주의 한자는 소주(燒酒)가 아니라 소주(燒酎)인데, '전국술 주(酎)'자는 잡물이 섞이지 않은 무회주(無灰酒)란 뜻이다. 세 번 빚은 술이란 뜻도 있다. '예기(禮記)'에는 '맹하(孟夏:음력 4월)에 천자가 마시는 술이 주(酎)'라는 기록이 있다. 초여름에도 마셨지만 원래는 음력 8월의 술이었다. '사기' 효문제(孝文帝) 본기(本紀)에는 소주를 고묘주(高廟酎)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漢)나라 종묘에 바치는 술이 고묘주인데, 정월 초하루에 술을 만들기 시작하면 8월에 완성된다. 고묘주를 주금(酎金)이라고도 하는데 한 무제(武帝) 때 제후들이 8월이면 종묘에 모여 순주(醇酒)를 올리는 의식을 갖는데, 이때 제후들이 제사 비용으로 금을 바쳤던 데서 나온 말이다.
소주는 한주(汗酒)라고도 했는데, 땀나는 술이란 뜻이다. 윤국형의 '문소만록'에는 임진왜란 때 임진강으로 도망간 선조가 시종에게 술이 있느냐고 묻자, "소주(燒酒) 한 병이 있다"고 답했고, 뱃사공이 갖고 있는 사기 종지(沙鍾子)를 구해서 한 잔씩 돌렸다는 일화가 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막내에게 보내는 편지(寄幼兒)"에서 성균관 유생 시절 정조가 옥필통(玉筆筒)에 삼중소주(三重燒酒)를 가득 하사하는 바람에 다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궁중 술도 소주였는데, 조선 때 이미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되었다. 숙종 46년(1720)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의현(李宜顯)은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우리나라 소주(燒酒)는 연중(燕中:북경) 사람들이 너무 독하다고 마시지 않고, 마셔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술이 더 독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정약용의 글 중에 "탁주 점점 사귀니 소주를 멀리한다〔漸交濁酒排燒酒〕"라는 시구도 있다. 지금은 탁주를 맥주(麥酒)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미국의 대학생용 영어사전인 '대학사전(Collegiate Dictionary)'에 '소주(soju)'를 쌀에서 증류한 한국의 보드카라고 수록했다는 보도를 보고 생각난 단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