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로드’ 읽어보셨어요?” 올 여름 들어 소설가 성석제씨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부쩍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떤 이야기기에…?’ 의아해하며 책을 구해 읽기 시작한 게 지난 7월 초, 책장을 덮은 그의 평가는 단 한마디였다. 잘 쓴 소설이다!
온·오프 서점 모두 '베스트셀러' 등극
미국 작가 코맥 매카시의 장편소설 '로드(원제 'The Road')'의 열기가 심상찮다. 지난 6월 17일 첫선을 보인 이 책은 출간 1개월 만인 7월 18일 현재 6만5000부가 인쇄됐다. 7월 넷째 주엔 4만부 추가 제작에 돌입, 40일도 안돼 10만부 고지를 돌파했다.
출간 직후부터 무서운 기세로 올라가던 판매 순위도 정점에 올랐다. 8월 20일 현재 '로드'는 인터넷 교보문고 국내도서 종합 2위를 기록 중이다. 1위 '하악하악'이 최근 방송 출연 등으로 상한가를 기록 중인 저자 '이외수 특수'를 반영한 책이라는 점, 3위 '시크릿'이 출간된 지 1년 이상 지나 스테디셀러에 접어든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로드'의 약진은 단연 눈에 띈다. 또 다른 인터넷서점 예스24와 알라딘의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어김없이 '로드'가 올라 있다.
외국 작가의 소설 한 편이 국내 서점가를 강타했다고 해서 그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로드' 열풍은 국내에서 잘 팔리는 해외 서적의 '공식'을 묘하게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로드’를 쓴 코맥 매카시(75)는 국내 독자에겐 작품으로도, 개인사(史)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나마 지난해 제작, 올 2월 국내 개봉한 코엔 형제 감독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로 알려지며 몇 차례 거명된 게 전부다. 국내외 서적을 불문하고 유난히 작가의 ‘브랜드’를 따지는 국내 출판시장의 경향에 비춰봤을 때 이례적인 일이다.
'해피엔딩' 편애하는 한국인이 좋아할까?
'로드'는 삼라만상이 불에 타버린 '멸망 이후 세계'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부자(父子)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미국이라고도, 세상 어느 곳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해가 뜨면 아침이고 어두워지면 밤이 되는 시간을 단둘이 헤쳐나가는 게 줄거리의 전부다.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존자 몇몇을 제외하면 등장인물도 아버지인 '남자'와 아들인 '소년' 둘뿐이다. 무작정 걷다 빈집이 눈에 띄면 들어가 먹을 것을 찾고 밤이면 잠을 청하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사건도 없다. 흔히 말하는 소설 구성의 3요소(인물, 사건, 배경)가 보란 듯이 배제돼 있다.
자기계발서와 잠언집의 인기가 베스트셀러를 독식하다시피 하는 최근 출판계의 동향과도 '로드'는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게 끝나버린 세상의 암울한 풍경 묘사는 이 소설에 '묵시록적 상상력'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한국판 '로드'의 책날개엔 "미국 현지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됐던 소설"이란 홍보 문구까지 등장했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우리 독자가 굳이 찾아 읽을까…?' 싶은 내용인 게 사실이다. '로드'를 번역, 출간한 건 문학동네였다. '출판 기업'으로 불릴 만큼 국내에선 규모와 취급 도서 면에서 수위를 다투는 대형 출판사다. 그래서 일부에선 "문학동네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히트 치지 못했을 책"이란 평도 나온다.
실제로 문학동네 측은 '로드' 출간을 전후해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대표적인 게 이른바 '봉인본' 마케팅이다. 책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봉인해 "책을 읽는 도중 재미 없어 봉인 부분을 뜯지 않으면 책값을 환불한다"는 이벤트를 펼친 것.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전략으로 '로드'는 초반 기세를 잡는 데 성공했다. 책이 시판되기 전 서평단을 모집해 가제본 형태의 책을 건넨 것도 주효했다. 책을 미리 읽은 서평단원들이 온라인 서점 게시판 등에 호평을 남겼고, 이는 곧 독자 관심 환기와 구매 확산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작품성·마케팅·높아진 독자 수준… "3박자 맞았다"
그러나 출판사 측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워낙 높았고 읽는 재미 또한 컸기 때문에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자신 있게 시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오영나 문학동네 해외문학1팀장은 "다소 어렵고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이 철학적이면서 감동적으로 구현되면서 독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오 부장은 "특히 독자 리뷰 중 '아들을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바가 컸다는 내용이 많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로드'의 독자층을 조사해보면 20~30대 여성이 주도하는 여느 베스트셀러와 달리 남성 독자층이 튼튼하고 연령대도 고루 분포해 있다.
성석제씨는 작가 특유의 흡인력 있는 문체에 주목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음 문장을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더군요. 늘 긴장을 유지하게 하고요. 모든 게 다 사라진 백지 같은 상태를 전제로 '너무 흔해 놓치기 십상'인 인간으로서의 미덕, 예컨대 부모와 자식 간 애정 같은 것들을 진부하지 않게 그리고 있어요." 허술해 보일 만큼 여백이 많은 점이 오히려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준다는 점도 그가 꼽는 '로드'의 미덕이다. 굳이 극중 설정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소설에 비춰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로드'의 예상치 못한 인기는 미국 출간 당시부터 화제였다. 평단과 언론은 단연 "코맥 매카시의 최고의 작품"이라며 '로드'를 치켜세웠다.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데 이어 미국에서만 180만부 이상 판매되며 대중과 평단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작가 경력만 40년이 넘지만 고작 10여편의 작품을 쓰는 데 그친 '은둔작가' 매카시가 오프라 윈프리와 가진 생애 첫 인터뷰도 '로드'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댕겼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작가는 한 명도 모르지만 과학자들과는 친하게 지낸다" "치약 살 돈이 없을 만큼 궁핍하면서도 2000달러짜리 인터뷰 제의를 거절했다" 같은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 '로드'의 국내 인기 요인 중엔 현지에서의 이런 반응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나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같은 책은 2005년 출간됐지만 지금까지 웬만한 신간보다 잘 팔린다. 한번 '대박'이 나면 얼마든지 롱런이 가능한 한국 출판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갓 출간 한 달을 넘긴 '로드'의 성공 여부를 벌써부터 점치긴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더 이상 우리 독자들이 '뻔한 베스트셀러 공식'에 갇힐 만큼 만만하지 않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있다는 건 우리 독서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 아닐까?" (인터넷 교보문고 회원 'mayshim'의 리뷰 중)
시선을 멈추게 하는 문장, ‘로드’ 다시 보기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9p)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 알았어요. (16p)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40p)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 망각으로 빠져든 사물들을 천천히 뒤따르는 그 사물의 이름. 색깔들. 새들의 이름. 먹을 것들.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이름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102~103p)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내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 (192p)
남자는 어린 시절 손가락 하나를 자신이 사는 도시에 올려놓고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곤 했다. 전화번호부에서 가족의 이름을 찾듯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그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느낌. 세상에서 정당성을 얻는 것. (207p)
미안하다. 내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 늘 그랬어. 너는 가장 좋은 사람이야. 늘 그랬지. 내가 여기 없어도 나한테 얘기할 수는 있어.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를 할 거야. 두고 봐. (31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