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분쟁 기도로 한국민들이 분노하는 가운데, 다시 광복절이 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영토 문제나 역사 왜곡만이 아니다. 일본의 집요한 한국 폄하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일본십진분류법(NDC)' 문제다.

NDC는 한국십진분류법(KDC)이 그런 것처럼, 일본 내 모든 문헌정보 분류체계의 표준이다. 일본의 각종 도서관을 비롯해 책과 자료를 보존·이용하는 모든 곳에서는 이 체계에 따라 책을 분류하고 독자들은 그 분류표를 참조해 책을 찾는다.

그런데 현행 NDC 체계를 보면 어찌된 일인지 '어학' 및 '문학' 분야의 분류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이라는 표기가 아예 없다. '중국어' 및 '중국문학'의 하위 범주 맨 마지막에 '동양의 제(諸)언어' 및 '동양문학'이 있고, 다시 그 하위 영역에 '조선어' 및 '조선문학'이 있을 뿐이다. 이는 일본의 '한국어'와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어와 한국문학이 중국어와 중국문학의 하위 범주로 구분된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현존하지 않는 '조선'의 국호가 그대로 쓰이고 있으니 기가 찰 따름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한반도를 조선반도로, 북한을 북조선으로 쓰고 있으며, 남북한이 분단돼 통일된 명칭을 찾기 어렵다는 현실적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현재의 대한민국(한국) 국호가 60년 이상 쓰였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과거의 국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코리아라는 명칭으로 쓰는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 '조선어'는 일본에서 이미 상용화된 '한글'(한국어) 등의 명칭 표기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중분류의 '중국어' 및 '중국문학'은 '아시아 언어/문학' 또는 '동양 언어/문학'으로 바꾸는 것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를 포괄하고 배려하는 명칭으로서 타당할 것이다. 조선어는 한글(한국어)로, 조선문학은 코리아문학으로 단일화하거나 또는 한국문학/북조선문학으로 분리해 개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상위 범주로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안 쓰이는 말을 만들어 한국의 위상을 격상시켜 달라는 것도 아니다. 보통의 일본 국민이 쓰는 말로 자신들의 문헌정보 표준을 바꾸라는 것이다. 한국이나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요, 조선은 과거의 국명이기 때문이다.

피식민지 시대였던 1928년 제정된 일본 NDC의 한국 관련 표기가 80년 동안 수정되지 않은 채 당당히 통용되는 것이야말로 식민 잔재요, 한민족에 대한 일본의 변함없는 멸시의 징표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글로벌 시대를 수용하지 못하는 일본 문헌정보 체계의 치욕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수정 요구를 하지 않은 우리 정부와 관계 기관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우리 KDC는 저간의 역사적 질곡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대접해 한국과 중국 다음으로 표기해 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만약 KDC에서 식민 잔재 청산을 이유로 일본문학을 독립시키지 않고 아시아의 하위 범주로 넣거나, 일본을 중국의 하위로 넣고 과거의 일본 지명을 쓴다면 일본은 좋겠는가. 최소한의 합리성과 상대주의를 견지하자는 것이다.

이제 진정한 선린우호를 위한 호혜성의 원칙과 지식정보 측면의 주권 수호를 되돌아볼 때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일본에 NDC를 고치도록 요구해야 할 때이다. 80년 전의 분류체계가 이대로 통용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지식정보 사회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고 양국 관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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