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천지(天智) 2년(663) 9월 조는 백제 부흥군의 수도였던 주유성(州柔城) 함락 기사를 실으면서, "이 때에 국인(國人)이 서로, '주유성이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백제라는 이름은 오늘로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가 있겠는가(丘墓之所 豈能復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구묘(丘墓)는 '한서(漢書)' 사마천(司馬遷) 열전의 "선인(先人)들을 욕되게 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부모의 무덤(父母之丘)을 찾을 수 있겠는가"라는 기사처럼 조상의 무덤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백제는 옛 일본의 지배층들에게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한반도에서 가까운 후쿠오카(福岡)현의 대야성시(大野城市·오노조시)에는 대야산(大野山)이 있다. 사왕사산(四王寺山)으로도 불리는데 이 산에 거대한 조선식 산성(한식 산성)인 대야성(大野城·오노조)이 있다. '일본서기' 천지(天智) 4년(665)조는 '달솔(達率) 억례복류(憶禮福留·오쿠라이후구루),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시히후구후)를 축자국(筑紫國)에 파견해 대야성과 연(椽·기이)성을 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달솔은 백제 16 관등(官等) 중 2품인 고위 벼슬이니 이 기사는 대야성 축성을 지휘한 사람이 백제인임을 말해준다. 이 성은 일왕 천지(天智)가 일본 구원군의 백제 출병을 직접 지휘했던 하카타만(博多灣) 연안에 있는 대재부(大宰府·다자이부)의 배후 산성이다. 몇 달 전 필자는 대야성을 직접 올라본 적이 있는데 백제나 고구려 산성에서 보이는 자연석을 엇물려 쌓은 거대한 성벽과 흙을 판축해 쌓은 거대한 토루(土壘)는 백제인들의 작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그런 성벽이나 토루를 만들 줄 몰랐다. 일본으로 퇴각한 백제인들은 대마도에 1차 방어선을, 일기도(壹岐島·이키시마)에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들이 무너지면 후쿠오카에서 결전하기 위해 이 부근에 대야성과 삼야성(三野城·미노조), 기이성(基肄城·기이조) 같은 조선식 산성들을 쌓았던 것이다. 일본 열도 곳곳에 남아 있는 백제인들의 유적은 현재의 독도 논쟁이 자신들 조상의 무덤이 있는 본향(本鄕)을 얼마나 모독하고 있는가를 발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