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 국세청(IRS)과 연방수사국(FBI)의 집중적인 탈세조사를 받은 스위스의 대표 금융그룹 UBS가 미국 고객들의 스위스 은행 계좌를 전면 폐쇄한다고 17일 발표했다. 예금주 신분이 공개되지 않는 스위스 은행 계좌가 전 세계 '검은 돈의 온상' 역할을 한다는 비판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미국뿐 아니라 세계 부유층들의 '안전금고' 역할을 했던 스위스 은행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UBS 글로벌 자산운용의 마크 브랜슨(Branson)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날 미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미 금융당국의 규제범위를 벗어나는 미 국민들의 스위스 은행 계좌를 모두 폐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폐쇄되는 계좌에 예치된 금액은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를 받는 별도 계좌로 옮기도록 고객들에게 권유한다는 것이다.
또한 블룸버그 통신은 "미 국세청이 UBS를 통해 개설한 스위스 은행 계좌정보를 제공받는 방안이 곧 합의될 것"이라고 보도해, 어떤 경우에도 고객정보를 지킨다는 스위스 은행의 마지막 성역(聖域)이 깨질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미 부유층, 스위스 은행 통해 연 100조원 탈세
이날 미 상원 조사소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 국민 중 스위스 은행계좌를 열고 있는 부유층은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또 미 국세청에 신고되지 않은 이 계좌에 예치된 금액은 1조5000억 달러(약 1500조원), 연간 탈세규모는 1000억 달러(약 100조원)로 추산된다. AP 통신은 "스위스 은행 계좌보유자 2만여 명 중 1000명 정도는 미 국세청에 예금액을 자진 신고했지만 1만9000여 명은 아직 신고하지 않았다"며 "그동안 미 국세청은 UBS와 스위스 금융당국에 이들의 신분을 공개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고 보도했다.
스위스 은행을 대표하는 UBS는 지금까지 자국 금융관련법에 따라 고객신분을 공개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텨왔다. 예금주 신분 비밀을 지켜주는 것을 무기로 세계의 막대한 자금을 유치해 온 스위스 은행의 존립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금융그룹 중 UBS가 글로벌 신용위기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아 매각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결국 미국 정부의 압력에 백기를 들고 만 셈이다.
◆세계 곳곳에서 탈세조사 거세
한편 미 의회는 작년에 '조세 도피처 악용 방지법'을 상정, 스위스 등 전 세계 조세피난처(tax haven·각종 세금규제가 적어 자금이 몰려드는 국가나 도시)를 겨냥한 '탈세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세계의 '탈세 천국' 34곳을 겨냥한 이 법안의 공동발의자 3명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Obama)도 포함돼 있다.
금융기관의 탈세방조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것은 미국뿐이 아니다.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의 세무당국도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유럽의 소국 리히텐슈타인의 LGT은행이 고객의 탈세를 도운 혐의를 잡고, 은행과 고객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