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과 훈구. 이 두 가지는 15세기 말엽 조선의 통치사를 읽어내는 핵심 키워드다. 역성혁명에 가담해 새 왕조를 창업한 공신 세력과 그 세습 후예들을 훈구파라고 한다면, 역성혁명에 반대해 변방으로 숨어든 고려 말 유신들과, 그들의 후예를 일러 사림이라고 한다. 훈구세력이 중앙권력을 독점하는 동안 사림은 각 지방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오피니언 리더 그룹'을 중앙 정계로 끌어낸 사람은 조선 9대 임금 성종이었다.

열세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 그는 사실 훈구파의 산물이었다. 당시 훈구세력의 좌장 격인 한명회가 그의 장인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성종은 유교적 왕도정치에 충실한 임금이었다. 즉위 7년 만에 할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난 성종은 훈구 권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김종직 등 사림세력을 중용하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조선은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득권 세력은 더욱 부자가 됐지만 백성의 삶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결국 상대적 빈곤감으로 백성의 불만만 높아지고 있었다. 사회적 신뢰는 무너지고 도덕과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

이처럼 사회 불평등과 풍기 문란이 당시 최대의 정치 쟁점이었다. 이에 대해 훈구세력은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사림세력은 지방자치를 통해 향촌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토록 하자고 제안했다. 더불어 그 구체적인 방법은 유향소(留鄕所)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유향소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운영되던 지방 수령의 자문기관이었다. 향리(鄕吏)들의 횡포를 막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며, 조세 부과나 징수 업무를 돕기도 했다. 한마디로 유향소는 '지방자치' 기관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유향소가 왕권을 저해한다고 보아 1406년에 이를 폐지했다. 세종은 유향소를 제한적으로 부활시켰지만, 세조 13년(1467년)에 다시 폐지되어 성종 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 유향소를 복립하자고 주장하면서 격렬한 논쟁의 불길을 당긴 사람은 사간원 헌납(獻納) 김대(金臺)였다. 성종 13년(1482) 1월, 사림 계열의 김대는 경연장에서 성종에게 아뢰었다.

"백성을 괴롭힘은 향리(鄕吏)보다 더한 자가 없고, 수령도 다 어질 수는 없습니다. 경재소가 있지만 귀와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규명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교활한 관리가 지나가면 닭과 개도 편안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유향소의 법이 매우 훌륭했습니다만 중간에 폐지되어 지금과 같은 폐단이 생겼으니, 다시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종은 귀가 솔깃했다. 그리하여 백관들에게 찬반토론을 붙인다. 그러자 사림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로 가뜩이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훈구세력은 당연히 반대 했다. 사실 유향소는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사림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그래서 영의정 정창손, 우의정 홍응, 선성부원군 노사신 등은 '유향소 반대론'을 펼쳤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저자

"앞서 유향소가 권위를 남용해 폐단이 많기에 선왕조(先王朝)에서 폐지한 것입니다. 간사한 아전을 견제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수령이 해야 할 일인데, 만약 모두 유향소에다 위임한다면 수령은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또 국가에서 수령을 뽑는데도 인재(人材)를 얻기 어려운데, 온 고을의 유향소에 어찌 다 올바른 사람을 둘 수 있겠습니까? 이는 큰 폐단만 될 뿐이옵니다."

하지만 상당수 대신들이 유향소 복립에 우호적이었다. 좌참찬 이극배는 "다시 유향소를 세워도 국정에는 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유향소에서 폐단을 일으키더라도 국법으로 견제하면 될 듯하옵니다."라며 소극적인 찬성을 했다.

그러자 성종은 이조에 명해 유향소 복립에 필요한 절목을 마련하라고 했다. 사실상 유향소 복립을 승낙한 것이었다. 그로써 명실공히 지방자치기관인 유향소가 복립 될 듯했다. 하지만 며칠 뒤, 이와 관련해 성종의 마음을 통째로 바꿔버린 이가 있었으니, 좌부승지 성준(成俊, 1436~1504)이었다. 유향소 복립을 철회하게 만든 성준의 '히든카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