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근자에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몇 군데서 조용히 일고 있다. '거실을 서재로' 만들어 책을 가까이 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캠페인도 벌어지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책을 읽으려면 책에 대한 접근이 쉬워야 하고, 책에 대한 접근이 쉬우려면 책방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책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디든 책을 찾아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책이 사람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누구를 기다리며, 시간이 남아서, 책방의 분위기가 좋아서 서점에 들르고 그러다 보면 책을 사게 되고 그래서 읽게 되는 것이 일반 도시민의 자연스러운 책읽기 과정이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쉽게 큰 책방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의 기노쿠니아(紀伊國屋)·마루젠(丸善)·준쿠도·산세이도(三省堂)·야에스(八重洲), 미국의 반스 앤 노블·프랑스의 프낙·독일의 후겐두벨 등 대형서점들은 3~5층 건물 전체가 책방이다. 기노쿠니아 본점은 9층 전부를 쓰고 있다. 책 전시장 내부에 에스컬레이터나 계단을 두어 각층을 연결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도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 앤 루니스 등 대형서점이 있다. 그러나 외국 서점과 비교해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외국의 서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상 1층에 자리잡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서점들은 서울 및 수도권의 경우 예외 없이 지하에 위치해 있다. 교보의 대구점·전주점, 영풍의 광주점을 제외한 16개 전국 지점들이 모두 지하 1층 내지 지하 2층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지상에 있는 서점의 비율이 92%, 미국과 독일이 95%, 프랑스가 98%(B서점의 추정치)인 것과 비교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다. 접근의 용이성 면에서 보면 우리의 사정은 형편없다.

비교적 근래에 태어난 대형서점은 아예 개업부터 지하에서 시작했고 지난 90여년간 근대사의 한편에서 묵묵히 우리의 독서문화를 지켜왔던 유서 깊은 종로서적, 양우당, 태평서적마저 지난 몇 년 사이에 문을 닫고 난 후로는 변두리 동네서점을 제외하고는 대형서점의 지상(地上)시대는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 독서인구의 70% 이상이 밀집해 있다는 수도권의 사정이 이럴진대 책을 아끼고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이렇게 공허할 수가 없다. 이미 지하로 내려간 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광주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여겨졌던 삼복서점마저 엊그제 마침내 문을 닫았다.

책방이 문을 닫거나 지하로 내려간 이유는 물론 있다. 인터넷 서점들의 할인판매로 매출이 줄어드는 데다가 지상의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원인은 시민, 정부, 건물주 모두 책과 독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도시의 환경적·문화적 이미지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데 있다.

근래 정부와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도시 미관을 강조하고 문화환경의 개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세계적인 공연예술을 뻔질나게 데려다 행사를 하고 세계적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등 한국 특히 서울은 이미 세계적 문화흥행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현상과 서점 없는 거리의 건조함, 책방이 지하로 숨어버린 도시의 삭막함은 너무도 이율배반적이다. 그러고도 서울을 문화의 도시라고 자랑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아니 분명 문화 사기(詐欺)다. 서점이 문을 닫거나 지하로 내몰린 자리에 액세서리 가게, 화장품 가게, 햄버거 가게, PC방이 대신 들어선 서울의 거리는 이악스럽고 돈 냄새로 가득하다. 여유가 없고 낭만도 없고 사람 사는 냄새도 없다.

우리 모두 이런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 먼저 당국이 의지를 가져야 한다. 세제 혜택이 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건물주가 1층 가게를 서점으로 임대하는 경우 건물주에게 세제 혜택을 주거나 서점에 직접 금융 지원 또는 세제 혜택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건물주들도 같은 값이면 서점을 유치하는 것이 건물의 문화적 가치를 올려준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한다. 세제 이외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가 장삿속으로 할 일이 아니다. 국민의 정신건강을 지키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화국가로서의 긍지를 갖고 해나갈 일이다.

도시의 심장부에, 온 시민이 언제나 손쉽고 자유롭게 사랑방처럼 드나들 수 있는 문화의 집합지로서 책방이 지상에 번듯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이 아쉽다. 밤이면 은은한 조명 아래 책을 읽고 사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들이 창가에 빛나고 잔잔한 음악에 도란도란 삶의 이야기들이 따라 흐르는, 그런 거리를 보고 싶다. 책의 향기와 사람의 향기가 어우러진, 그런 열린 땅 위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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