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낮(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9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의 디올 옴므 패션쇼장. 야외 자갈밭에 꾸며진 런웨이 위로 길쭉한 팔다리의 남자모델들이 걸어 나온다. 이국적인 서양모델 사이 반짝거리는 갈색 바지에 검은 재킷을 입은 동양인 모델 하나가 눈에 띈다. 동양 남성 최초로 이 브랜드의 모델로 선 한국인 김영광(21)씨다.

"영광이죠, 영광. 한동안 멍했어요." 이번 패션쇼에 앞서 지난 20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한식당에서 만난 김씨는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영광'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디올 옴므 모델로 발탁됐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얼굴엔 상기된 빛이 완연했다. 남자 모델들 사이에서 디올 옴므 패션쇼는 '꿈의 무대'로 꼽힌다. 모델을 뽑는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데다 그동안 동양인에겐 유독 문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디올 옴므는 남성복에서 솔이 좁고 딱 붙는 스타일의 '스키니 룩'을 처음 제안한 브랜드로 하체가 늘씬한 이들만 입을 수 있도록 일정 사이즈 이상은 만들지도 않는 '콧대 높은' 브랜드다.

"좋았죠. 딱 1분간만." 그는 "날아갈 듯 기뻤다가 조금 지나니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마지막 3분 안에 캐스팅이 바뀔 수 있는 불확실성도 그를 불안케 했다.

187㎝, 71㎏. 구(九)등신에 가까운 '가냘픈 덩치'인 그는 올 초 밀라노 컬렉션에서 알렉산더 맥퀸, 비비안 웨스트우드, 에트로 무대에 올라 화제를 모았지만, 아직 세계 패션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여전히 동양인에 대한 시선이 호의적이진 않아요. 오디션에서 워킹시켜 놓고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아요. 무시당한 기분 들 때도 솔직히 있죠." 그래도 "네가 한국 남자 모델계의 희망이다. 잘해라"는 주위의 격려 덕분에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고 했다.

김씨는 3년 전 TU미디어 광고에 뒤통수 모델로 출연했다가 기획사 눈에 띄어 모델 일을 시작했다. 유럽형의 몸매에 동양적인 얼굴로 유럽 무대에 '존재감'을 알리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유럽 거리를 다니면 아직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요. 게이 아저씨들이 와서 윙크하고 가는 정도?(웃음) 어디서나 알아볼 수 있는 톱 모델이 되는 게 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