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런 소원이 있었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걷고 싶다고. 지금 나에게 이 축복받은 겨울이 있다. 장래 결혼을 하면 서영이에게도 아이가 있을 것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렇지 않으면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좋겠다. 그리고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 살겠다.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수필가 피천득(1910~2007)은 장녀 피서영(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을 소재로 한 수필 〈서영이〉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외손주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조심스럽게 그려봤다. 그 수필에서 피천득이 꿈꿨던 외손자 스테판 재키(Jackiw·23)가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해 국내 연주 무대를 갖는다. 리처드 용재 오닐(비올라), 임동혁(피아노) 등 젊은 인기 연주자들과 함께 결성한 앙상블 〈디토(Ditto)〉의 멤버로 28일 예술의전당에서 실내악 연주를 펼친다.
피천득은 수필에서 "나는 《파랑새》 이야기도 해주고 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의 엄마처럼 나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장기도 둘 것이다. 새로 나오는 잎새 같이 보드라운 뺨을 만져보고 그 맑은 눈 속에서 나의 여생의 축복을 받겠다"고 적었다.
재키는 8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네 살 무렵부터 10대가 될 때까지 여름마다 한국을 찾아서 여름 방학 내내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작품 여러 편을 영문으로 내셨고 평소에도 영어를 완벽하게 쓰셨기 때문에 우리는 무척 가깝게 지냈죠.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영상이나 카라얀이 지휘하고 안네 소피 무터(바이올린)가 연주하는 비디오를 함께 보기도 했어요. 할아버지는 무터의 팬이었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소개해주기도 하셨어요."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음악에 대한 이해가 생겼고, 할아버지의 작품을 통해 문학에 대한 이해 역시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서울시향 협연 무대에서는 당시 96세의 나이로 공연장을 찾았던 외할아버지를 위해 쇼팽의 녹턴을 앙코르로 선사하기도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무척 사랑하셨던 곡인데다 슬픔과 희망을 함께 지니고 있는 감동적인 작품이라 골랐다"고 말했다.
물리학자이자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재키는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과 심리학을 전공한 뒤 뉴 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2002년 미국에서 활동하는 젊은 연주자에게 수여하는 상인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았고, 지난해 뉴욕 필하모닉의 '파크 시리즈(Park Series)' 연주회에서 협연하기도 했다. 그는 "요요마(첼로)와 기돈 크레머(바이올린)처럼 언제나 호기심을 잃지 않고 항상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음악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