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런스 데이브 터너(Clarence Dave Turner) 미 공병 극동사령관은 지난 5월 '태건호(太建護)'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 그는 주한미군 이전기지 건설을 담당하고 있다. 이름을 지어준 한·미동맹친선회는 "Turner의 'T' 발음에 착안해 성을 '클 태(太)'로 정했으며 본관은 미 극동사령부의 국내 주소지인 '서울 중구 을지로 5가'를 따서 '을지(乙支) 태씨'로 정했다고 지난 5월 22일 밝혔다.

친선회는 "'을지 태'라는 성씨에는 고구려 명장인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얼이 서려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단체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터너 사령관은 붓글씨로 적은 자신의 한국 이름을 받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프로야구 롯데 팬들이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위한 애칭 '제일호(第一號)'를 선물했다. 구단 홈페이지(www.giantsclub.com) 내 갈매기 마당에 한 팬이 "감독님의 한국 이름을 지어주자"고 제안해 제일호, 재희, 노이사, 노석태 등 다양한 후보작이 거론되었으나 프로야구 첫 외국인 감독과 1등 감독이 되어 달라는 팬들의 소망이 깃든 '제일호'로 정해진 것이다.

히딩크의 '희동구(喜東丘)'가 붐 일으켜

최근 저명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식 한자 이름을 얻는 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식 한자 이름을 짓는 사례는 개화기 때부터 있었으나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개화기 때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 빨리 뿌리내리기 위해 한국 이름을 지었던 것이 보통이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의 고충을 배려한 것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선교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외국인들이 동참하고 있고 작명 이유도 친근감을 느끼거나 재미 삼아 하는 것이 적지 않다.

외국인들의 한국 이름은 한국 사회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이방인을 기리고자 지인들이 붙여준 것인 만큼 한국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이래저래 '불출'이 될 판이다. 반면 한국 이름을 갖고 있는 외국인은 그만큼 국제화와 현지화에 성공한 인물로 간주된다. 서양인들 사이에서 젓가락질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국제화의 척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이름 작명에 붐이 일어난 계기는 히딩크 감독이 제공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인들은 히딩크 한국 국가대표 축구감독에게 비슷한 발음의 '희동구(喜東丘)'라는 한자이름을 지어줬다. 그는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상암동을 따서 상암 희씨의 시조라는 유머도 나돌았다. 2002년 6월 14일 우리나라가 48년 만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자 인터넷에 히딩크 감독의 가상(假想) 주민등록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네티즌들이 히딩크에게 주민등록증까지 발급해준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의 주민등록번호는 461108-1002016, 주소는 대한축구협회, 발행자는 대한민국 국민일동, 발행일자는 2002년 5월 31일로 돼 있다. 이 주민등록증은 물론 진짜가 아니다.

본프레레 감독은 '조봉래', 라이스 국무는 '라이수'
히딩크 감독의 후임자들도 한국식 이름을 얻었다. 조 본프레레 감독은 '조봉래'로 불렸다. 네티즌 'Heart Breaks Kid'는 2005년 8월 5일 다음카페에서 "조봉래 감독이 조 본프레레 감독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본프레레 감독의 성적이 부진했던 탓인지 이 이름은 욕할 때 많이 쓰였다. 2005년 8월 7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한·일전이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일본에 0 대 1로 패한 뒤 붉은 악마 응원석에는 감독과 축구협회를 비난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조봉래(본프레레 감독), 무개념의 한국 축구" "귀머거리 벙어리 대한축구협회" 등 거칠고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아동복'으로 불렸으나 역시 '희동구'만큼의 애정은 얻지 못했다.

라이스(콘돌리자 라이스 미국무장관) 석호필(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역) 제일호 (제리 로이스터, 롯데 프로야구 감독) 조재필(제프리 존스, 전 주한 미상공회의소 회장)

잠깐 한국을 다녀가거나 한국과 관련 있는 외국인들도 한국 이름을 얻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지난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미동맹친선회로부터 '라이수(羅梨秀)'라는 한국 이름을 받았다. '아주 아름다운 한 송이 배꽃'이라는 뜻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힐사모' 등 국내 네티즌 팬들로부터 '한덕(韓德)'이란 이름을 얻었다. 감옥을 무대로 형제애를 다룬 미국 TV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스코필드 역을 맡은 웬트워스 밀러는 한국에서 '석호필(石好弼)'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이 드라마의 열성 팬들은 주인공을 본명 대신 '석호필'로 부르는 게 관례다. 석호필은 전통을 자랑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영국의 의학자이자 선교사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이름이기 때문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때 일제의 학정을 전세계에 고발한 친한파 인사다.

벨 前 한·미연합사령관에 백보국(白保國) 선물
주한 미 7공군사령관인 스티븐 우드(Stephen G. Wood) 중장의 한국 이름은 '우창희(禹蒼熙)'다. 한·미동맹친선회는 지난 3월 24일 미 7공군 장교클럽에서 붓글씨로 우드 중장의 한국 이름을 쓴 액자를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다. 성(姓)은 'wood' 발음을 따 '하우 우(禹)' 씨로 정하고 본관은 7공군사령부의 주소지를 따서 오산 우씨로 했다. 이름은 7공군사령관의 직함을 고려해 '푸를 창(蒼)' '빛날 희(熙)'로 지었다. 맑고 푸른 하늘에서 한반도 영공방위 임무를 빛내는 공군의 영웅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 단체는 이밖에 버웰 벨 전(前)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백보국(白保國)',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에게 '박보우(朴寶友)', 버시바우 대사의 부인 리사 버시바우 여사에게는 '박신예(朴信藝)'라는 이름을 지어 선물한 바 있다. 박보우는 한·미 간 우정을 보물처럼 잘 다뤄 더욱 공고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백보국은 한국의 방어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레온 라포트 전 한·미연합사령관의 한국 이름은 '라보태(羅寶泰)'다.

다국적 회사 CEO들 "한국 이름 덕 톡톡히 봤다"
히딩크 이후 한국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 한국 이름 짓기가 확산되고 있다. 친근한 한국 이름을 내보이면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고 사업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그만둔 다국적 제약회사 한국릴리의 랍 스미스 사장은 재임 시 '우인성(優人誠)'이란 한국 이름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보도자료에도 아예 '우인성'으로 표기하고 괄호 속에 '본명 랍 스미스'라고 덧붙일 정도로 한자 이름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한국릴리 직원 300여명이 사내 공모를 통해 '우인성(優人誠)'이란 한국어 이름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우인성은 이 회사의 가치인 '우수성' '인간존중' '성실성'의 앞 글자에서 각각 땄다. 미국계 보험사 메트라이프 생명보험의 스튜어트 솔로몬 사장은 지난해 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설민수(雪敏秀)'란 한국 이름을 선물 받았다. '설'자는 솔로몬의 발음에서 음차한 것이고, 빼어나다는 뜻을 담은 '민수'는 지혜의 왕인 솔로몬의 의미를 살린 것이다. 주한 미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 미래의동반자재단 이사장은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으로부터 '조재필(趙在弼)'이란 이름을 받았다. 세페리노 아드리안 발데스 페랄타 주한 파라과이 대사는 '박대수'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박종갑 홍보실장은 "한국이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로 위상이 커졌고 한국에서의 실적이 해외 본사의 인사고과에 직결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한국 이름을 갖는 외국인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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