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최대의 종합시장인 '기페르 마켓'. 2000여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시장 입구와 건물 로비를 꽉 메운 채 북새통을 이뤘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한국 장미 보셨나요? 한 송이씩 무료로 받아 가세요!" 한복을 입은 금발의 러시아 미녀 도우미들이 밝은 표정으로 시민들에게 장미를 나눠줬다. 장미를 손에 쥔 시민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아직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장사진을 이룬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날 장미 나눠주기 행사는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충북 진천지역 장미 재배 농가들이 벌인 깜짝 이벤트였다. 방송국과 신문사 취재진이 몰려와 주최 측과 시민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는 등 현지 언론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충북 진천군의 대표적 농특산품인 장미가 러시아 수출의 물꼬를 트면서 세계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에만 집중됐던 해외 판로가 러시아까지 열리면서 장미의 고장 유럽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 진천군 내 장미 재배 농가들은 이번 러시아 시장 개척 활동을 통해 3년간 300만 달러의 수출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해외시장개척단을 인솔한 충북도 원예유통팀 류기창 담당은 "러시아 국민들이 한국산 장미를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며 "시장개척단 전체 수출계약 물량의 30% 이상을 장미가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수출물량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러시아 바이어들은 최근 한국을 방문해 서울 양재동 화훼공판장과 서초동 강남지하상가 꽃시장, 진천 장미단지 등을 직접 찾아 수출 확대 방안을 협의했다.
중부고속도로변에 자리 잡은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삼용리 화훼단지. 여름을 재촉하는 들녘 곳곳에 장미 재배용 시설하우스가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 식물원 온실에 들어선 것처럼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고, 진한 장미냄새가 코를 스친다. 온실 한편에선 갓 수확한 장미를 다듬어 깨끗하게 포장하는 농민들이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다.
"러시아로 수출되는 겁니다. 내일 선적하려면 빨리 서둘러야 하는데 일손이 달려요." 진천화훼수출작목회 이현규(45) 작목반장은 한 다발의 장미꽃을 들고 "생산 물량이 부족해 주문이 많이 밀려 있다"며 즐거워했다. 이번에 시장개척단 일원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씨는 "꾸준히 물량을 대줄 수 있는 생산기반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삼용리 화훼단지는 한 마을에 모여 있는 단일 수출장미 단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 이곳에선 38가구의 농민들이 16만7725㎡ 규모의 장미 재배 시설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장미는 계절적 수요와 국제시장 변화추이에 따라 가격 등락이 심한 품목. 이 때문에 농민들이 일년 내내 꾸준한 안정적 판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 판로가 개척되면서 이 마을 농민들은 부농의 꿈에 부풀어 있다. 러시아를 포함한 외국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장미는 한 가지에서 여러 송이가 피는 일명 스프레이(Spray) 품종. 우리 국민들에게 낯익은 한 송이짜리 스탠더드(Standard) 품종과 전혀 다른 '미니 장미'다. 이 때문에 이 지역 농민 5가구는 러시아 수출의 물꼬를 튼 이현규 작목반장의 권유로 올해 심는 품종을 스프레이 계통으로 바꿨다. 일본에 수출하는 것보다 수입이 짭짤하기 때문에 내년까지 대략 절반 정도의 농가가 러시아 쪽으로 눈을 돌릴 것으로 예상된다.
진천지역 농가들이 러시아 시장을 처음 개척한 것은 지난해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시장개척단이 현지 바이어를 확보하면서 수출길을 열었고, 선박을 이용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운임이 저렴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수출이 시작됐다.
진천 삼용리 장미단지의 올해 대(對)러시아 수출 목표액은 100만 달러. 충북도는 진천 화훼농가의 수출 활성화를 위해 올해 화훼단지 시설 개선과 품종개량 사업을 펴기로 하고 농림부에 70억원의 예산배정을 요청했다. 진천장미수출영농조합법인 이천희(52) 대표는 "기후와 품종 등 재배여건을 따져볼 때 진천 장미는 구소련 지역은 물론 동유럽 지역에까지 가격 경쟁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며 "내년부터는 대규모 장미 수출기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