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호텔에서 한 남자가 "나를 통해 세상을 다시 보라"고 여자를 껴안는다. 남자는 28세 미혼, 여자는 딸이 둘 있는 38세 유부녀다. 여자는 남편이 20대 여성과 외도(外道)를 벌이자 충격을 받아 떠난 여행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이렇게 밤을 보낸다. (2008년 MBC 주말 드라마 '달콤한 인생' 3화)
#2 한 여자가 자기 친구에게 말한다. "나도 뜨거웠고 네 남편도 뜨거웠어. 임자 있는 남자 나누어 갖는 여자가 원하는 게 뭘 거 같니? 혼자 갖고 싶은 거 아니겠니?" 대학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친구의 남편과 바람이 난 여자는 그게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2007년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6화)
#3 의대생 아들, 전교 1등 딸을 둔 여자의 남편은 능력 있는 사업가다. 아들과 딸은 자신들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란다. 어느 날 남편의 옷에서 여성용 향수 냄새가 난다. 향수의 주인공은 남편의 사업 파트너. 남편은 "사실은 그 여성이 아이들의 친엄마"라며 이혼을 요구한다. (2008년 KBS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435화)
KBS는 최근 아침 드라마 '난 네게 반했어'를 시작하며, "불륜(不倫)이나 출생의 비밀이 없는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불륜 없는 드라마가 예외일 정도로 불륜은 한국 TV의 아침 시간과 밤 10시 이후를 지배하는 주제다.
방송 3사는 최근까지도 불륜 드라마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침 드라마를 오전 7시50분(MBC) 오전 8시30분(SBS) 오전 9시(KBS)에 배치했다. 아예 안 보면 모를까, 드라마를 보겠다고 작정하면 불륜이란 주제를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TV 속 불륜의 고전적인 공식은 남자가 결혼 전 만나던 여자와 헤어지지 못하고 계속 만나는 형태였다. 요즘은 유부남이 자기 아버지가 예전에 사랑했던 연인의 딸을 사귄다. 시동생이 형수를 연모하기도 한다. 유형과 강도가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왜 TV는 불륜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상상 가능한 모든 불륜을 보여주겠다!
우리 TV는 불륜에 관해 다룰 수 있는 모든 설정을 다 보여준다. 비틀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다 비튼다. 불륜에 관한 백과사전을 만들겠다는 듯 다양하게 불륜을 변주한다. 불륜을 소재로 심하게 비틀린 구조로 전개되는 드라마에 대해 작가들끼리도 '독한 드라마' '독한 장치를 쓴다'고 표현한다.
①아내는 연하남과 바람피워 남편에게 복수한다.
SBS 주말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에서 바람난 남편에게 쫓겨난 서른일곱 살 아줌마를 구원해주는 것은 여섯 살 연하인 남자다. 이 '구세주'는 대기업 본부장에 '꽃미남'이면서 남자다운 포용력까지 갖췄다. 시청자들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배반당한 아줌마가 복수와 행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고작 연하남과의 사랑뿐이냐"라고 따진다.
②한국 불륜 드라마엔 늘 출생의 비밀이 있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KBS 주말 드라마 '행복한 여자'에서 주인공 여자는 이혼당한 후 다른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다. 그러나 그 남자의 의붓아버지가 바로 이혼녀의 친아버지다. 2004년 MBC에서 방영된 '성녀와 마녀'에서는 유부남이 자기 아버지의 젊은 시절 애인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2004년 방송위원회는 이런 내용이 비윤리적이라며 개선하라고 권고 조치했다.
③부부간에 '크로스'로 불륜을 저지른다
SBS 주말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서는 두 커플이 서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불륜에 빠진다. 불륜에 빠진 남녀의 배우자들이 자신들끼리 불륜을 저질러 "네 속도 한번 뒤집어져 봐라"는 식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④불륜 경쟁에는 자매도 없다
SBS 일일 드라마 '물병자리'에서 두 여주인공은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자매 같은 사이다. 한 남자와 동거하며 아이를 낳은 여자가 남자 부모에게서 어렵게 결혼 허락을 받은 뒤 교통사고를 당해 남자는 죽고 여자는 기억상실에 빠진다. 남자의 가족은 아들과 동거하던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다른 여주인공이 기억상실에 빠진 여자 행세를 하며 아이를 데리고 죽은 남자의 집에 들어가도 모른다. 이후 두 여자는 죽은 남자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윤리문제를 피하려 '고아원에서 자매처럼 자란 사이'라는 완충장치를 뒀지만 끔찍한 설정이다.
⑤고전형도 여전히 살아있다
어린 시절 만나던 연인의 사회적 지위가 변해 관계가 복잡해지는 경우다. 상승한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배우자와 결혼한 후 옛 애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거나 임신을 해 관계가 얽히고설킨다. 가장 일반적 불륜 형식은 SBS 주말 드라마 '행복합니다'에 등장한다. 재벌 2세 남자가 고아원 출신인 여동생 친구와 만나면서 결혼은 어머니가 정해준 여자와 한다.
⑥여왕벌형(型)도 볼래?
'불륜' 코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정'의 구성 방식을 파격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KBS 수목 드라마 '아빠 셋, 엄마 하나'는 기획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불임으로 고통받는 친구에게 다 같이 힘 모아 사정없이 정자를 기증했다. 그런데, 정자를 기증 받은 녀석, 아빠가 되기도 전에 비명횡사하고 만다. 철없는 세 총각, 졸지에 아빠 되고 고생길이 열렸다. 너희들이 아빠라고? 누구 맘대로? 난 세 남자가 필요한데, 넌 어때? 음흐흐흐흐 그냥 이대로 셋 다 거느려 버려? 귀여운 아기와 더 귀여운 엄마의 세 총각 사로잡기."
◆불륜 드라마가 쓰기도 쉽고 시청자를 유혹하기도 쉽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눈에 반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양쪽 집안이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집안 반대'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설득력과 극적 긴장감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SBS 주말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의 문영남 작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드라마의 기본 소재이지만 지금 시청자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은 미혼인데 자기네들이 죽고 못산다면 그냥 도망가서 살면 될 일을 웬 집안 핑계냐'고 할 것이다"고 했다. 문 작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현대판은 뭐겠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의 사랑 아닐까요? 금단의 열매와 같은…"이라고 했다.
드라마를 쓰는 입장에서 불륜이란 주제를 택할 때의 장점이 있다. 드라마를 여러 가지 방향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미혼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갈등이 단선적이다. 불륜에서는 갈등을 더 강도 높게 고조시킬 수 있다. 갈등이 더 여러 갈래로 퍼져 드라마 전개도 쉽다. 불륜에 빠진 기혼남녀 간 갈등, 그 남녀 각각의 배우자와의 갈등, 자녀와 벌어지는 갈등처럼 새 이야기를 만들 소재가 훨씬 더 많아지는 것이다.
최근까지 SBS 아침 드라마 '물병자리' 대본을 썼던 이주희 작가는 "일주일에 5~6회 방영되는 일일 드라마는 기획 때부터 여러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있는 소재를 고른다"고 했다. MBC 아침 드라마 '흔들리지마'의 신희원 공동 작가(책임작가 이홍구)는 "스토리가 단선적이 되면 호흡이 긴 아침 드라마는 한계에 부딪힌다"고 했다.누가 아침 드라마와 밤 10시대 멜로드라마의 주 시청자인가 하는 것도 '불륜'을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시키는 주 요인이다. MBC 일일 드라마 '흔들리지마' 이홍구 작가는 "주 시청자가 40~60대 주부인데 이들에게 10~20대의 사랑이 공감을 얻겠냐"면서 "그들 또래는 결혼한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불륜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불륜 드라마가 비용이 싸게 먹힌다
왜 TV에서 벌어지는 불륜은 가족들끼리 서로 다 아는 가까운 집안 사이에서 복잡하게 꼬여갈까. 작가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다. SBS '행복합니다' 김정수 작가는 "결국은 돈의 문제"라고 했다.
"이 가족과 저 가족이 연결이 안 되는,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요. 시청자들의 요구도 그렇고요. 그러나 등장인물과 세트의 수 등 실질적인 고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제한된 공간과 등장인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처럼 시간을 충분히 준다면 이렇게 단순한 구도가 나오지는 않겠지요. 우리 현실이 이렇게 몰아가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불륜 드라마만 쓰는 작가는 없다
"이번에 극을 쓸 때도 '시간대에 맞게 가자'고 했습니다. 좋은 이야기만 쓰고 싶은 마음이지만 요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재미있어하나요. 선량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흥미롭지 않잖아요."
SBS 주말 드라마 '행복합니다'의 김정수 작가는 건전 드라마의 대명사인'전원일기' 작가다. 그는 '재벌 2세가 어머니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 처가에 할 도리를 다하면서도 고아 출신의 여성과 내연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드라마 골격이 '심한 것 아니냐'고 하자 이렇게 설명했다.
유부녀와 20대 청년의 파격적인 정사신으로 화제가 됐던 '달콤한 인생'의 정하연 작가는 '명성황후' '신돈' 등 굵직한 역사물로 유명하다. '여왕의 조건' 등 소위 '독한 아침 드라마'로 유명했던 박현주 작가는 베트남 신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황금신부'로 외국인 신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시청자들도 욕하면서 불륜 드라마를 즐긴다
지난해 여름 한국방송비평회 세미나에서 강승구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불륜' 드라마가 현실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불륜을 한번이라도 동경한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동기 부여를 해 단 한 번이라도 실제 불륜을 경험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면 그 드라마의 폐해는 매우 커질 수 있다. 가정주부들의 불륜에 대한 잦은 묘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불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이런 현상은 TV 수용자들의 '자기 정당화 효과'를 가져오는 데 한몫 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KBS 주말 드라마 '행복한 여자'를 썼던 박정란 작가는 "불륜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도 우리는 마치 없는 것인 양 덮어두는 것이 좋다는 식의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며 "시청자들이 공감하지 않고 거부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는 없다"고 했다.
MBC 주말 드라마 '달콤한 인생'을 집필 중인 정하연 작가는 중년 여성과 20대 청년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보는 데 대해 "불륜이란 사랑 없이 나누는 육체적 관계 아니냐"면서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사랑에 빠진 것을 중년 여자와 젊은 남자의 하룻밤 잠자리로 생각하는 것은 드라마를 잘못 본 것"이라고 말했다.
아침 드라마 '여왕의 조건'을 쓴 박현주 작가는 "불륜은 소재일 뿐 결론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뉘우치는 구조인 만큼 불륜에 대한 조장이 아니라 경계"라고 했다. 김정수 작가는 "40~60대 여성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비록 일그러진 거울이라고 해도 현실은 분명히 비추고 있다"고 말했다.
문영남 작가는 "불륜을 다룬 드라마를 보고 '나도 불륜해야지'라는 성인이 어딨냐"고 되물었다. SBS '물병자리' 집필을 최근까지 맡았던 이주희 작가는 "애정 문제는 늘 우리의 관심 대상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대중의 관심코드이기 때문에 불륜이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희원 작가는 "작가·제작사의 매너리즘을 탓하지만 그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요구도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 '애인'의 최연지 작가는 "현실과 멀어지는 건 아쉽지만,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현실이 아니라 환상을 보려 하기 때문에 독한 장치가 쓰이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