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둘기’라고 들어보셨는지. ‘닭+비둘기’의 합성어다. 도시에 서식하며 쓰레기통 등에서 많은 음식을 먹어 닭처럼 뚱뚱하고 잘 날지도 못하는 비만형 비둘기를 뜻한다. 사람이 다가가도 무시하거나 뒤뚱뒤뚱 잠시 옆으로 갔다가 다시 와서 모이를 쪼기 바쁘다. 몇 전 전만 해도 도시 공원이나 기차역은 닭둘기들의 지상낙원이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떼가 광장을 차지했고, 사람들은 비둘기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최근 서울역 광장 등에서 비둘기 수가 예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는 제보가 연이어 들어왔다. 또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는 "동네에서 죽은 비둘기를 발견했는데 AI(조류 인플루엔자) 때문인 것 같다"는 시민 신고가 빗발쳤다. 정말 비둘기들은 AI 때문에 그 수가 감소한 것일까?

◆ “한국에서 AI걸린 비둘기 한 차례도 발견 안 돼”

19일 오전 10시쯤 서울 용산역에는 비둘기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환경미화원 김성규(64)씨는 “2년 전부터 비둘기가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며 “그래도 최소한 10여 마리 이상은 보였는데, 최근 한 달 동안 하루에 몇 마리 보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이날 오전 11시쯤 서울역에는 비둘기 10여 마리가 정도가 사람들을 피해 드문드문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수 년 전만 해도 수십여 마리가 군집을 이루며 광장 가운데를 점령하다시피 해 사람들이 피해 다닐 정도였다. 2년 전부터 서울역 앞에서 수퍼를 운영해 온 정모(여·52)씨는 “처음에 여기 왔을 때보다 비둘기 수가 반 이하로 준 것 같다”고 했다.

종로 탑골공원도 사정은 마찬가지. 탑골공원 관계자는 “5년 전에는 비둘기가 100여 마리 정도 있었는데 현재는 30~40마리 정도만 보인다”고 밝혔다.

비둘기 외양도 바뀌었다. 서울 곳곳에서 발견한 비둘기들은 대부분 삐쩍 말라 있었다. 뚱뚱한 외양 때문에 ‘닭둘기’라는 별명이 붙여졌다면 이제는 병든 닭처럼 호리호리하다는 의미에서 ‘닭둘기’로 불러도 될 정도다.

19일 서울역 모습(위 사진)과 1998년 1월 서울역 모습(아래 사진). 더 이상 서울역에서는 과거와 같이 무리지어 하늘을 나는 비둘기 모습을 볼 수 없다.

"AI 때문에 비둘기가 죽거나 병들어서 그렇다"는 추측이 나왔다. 시민들은 죽은 비둘기를 발견하고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신고하기 바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지난 14일 "광진구 등 9개 자치구에서 수거한 비둘기 15마리를 정밀 검사한 결과 모두 AI 음성 반응을 보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성 서울시 경쟁력강화본부장은 "비둘기는 일반적으로 AI에 저항성이 강해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고 밝혔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이병권 수의사무관은 “비둘기가 (다른 조류에 비해) AI에 저항성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는 세계에서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다”며 “아직 우리나라에서 AI에 걸린 비둘기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이 사무관은 “비둘기도 일부러 AI 바이러스를 많이 먹이거나, 주사로 접종하면 걸릴 수 있다”면서도 “올해는 물론 2003년과 2006년 비둘기 AI신고가 들어와 검사했지만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고 밝혔다.

비둘기를 통한 AI 인체 감염도 현재까지 세계에서 보고된 사례가 없다고 한다. 다만 비둘기 배설물에서 곰팡이가 발생하고, 그 곰팡이 때문에 사람이 오염성 폐렴에 걸릴 가능성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 “죽은 비둘기 많이 발견됐다고 수 줄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워”

비둘기 먹이가 부족해 굶어 죽은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서울시 한강시민공원 등 여러 공원에서는 “비둘기가 불결하고 똥으로 문화재가 파괴된다”며 최근 몇 년간 비둘기 모이 안 주기 운동을 펼쳤다. 한강시민공원 여의도 안내센터 측은 “지난해부터 모이를 안 줬더니 1년 몇백 마리에서 100마리 이하로 수가 줄었다”고 했다. 탑골공원 관계자는 “비둘기 똥이 공원 안 문화재를 부식시킨다는 광복회 등 지적에 따라 2002년 5월부터 시민들이 먹이 주는 것을 못하게 했다”며 “그 이후로 비둘기수가 준 것 같다”고 했다. 용산 환경미화원 김성규씨는 “과거보다 청소를 자주 하고 주변 정리를 깨끗하게 하다 보니 비둘기 먹이도 따라 줄었다”고 했다. 서울역에서 수퍼를 운영하는 정씨는 “옛날에는 가끔 라면 부스러기를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최근 AI 여파로 비둘기와 접촉하면 안 된다는 경고 때문인지 그런 사람도 싹 사라졌다”고 했다.

한 곳에 거대한 군집을 이루는 예가 줄어들었을 뿐 전체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철새연구센터 이창용 연구원은 “역이나 공원 광장에서 거대한 군집을 이루면서 살았던 비둘기가 개체수가 급격히 늘고 먹이는 오히려 감소하자 소규모 집단으로 나뉘어 분산해 서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밝혔다. 과거에 비둘기가 잘 보이지 않았던 동네 골목이나 대학가 주변에서 비둘기를 자주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 이 연구원은 “주 서식지였던 역 대부분이 최근 몇 년 새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자 비둘기가 단체로 서식지를 옮겼기 때문에 용산역 등에서 비둘기를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죽은 비둘기가 많이 신고되는 이유에 대해 이 연구원은 “개체 수가 많아지다 보니 이에 따라 유리창에 충돌하거나 병에 걸려 죽고, 굶어 죽는 마릿수도 똑같이 증가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효창공원 관계자는 “공원을 방문한 사람들이 비둘기가 왜 이렇게 줄었냐고 종종 묻지만 사실 수는 줄지 않았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원래 공원 분수대 광장에 200여 마리가 서식했는데 지난해 비둘기 똥이 너무 많다는 민원이 제기돼 다 쫓았더니 분수대 쪽에는 50여 마리만 남았다”면서 “그러나, 그 비둘기 중 100여 마리는 후문 쪽으로 이동했고, 나머지는 놀이터 쪽에 터를 잡았다”고 밝혔다.

"더 이상 닭둘기라고 부르지 마세요." 19일 서울역에서 본 비둘기는 먹이를 많이 못 먹은 듯 삐쩍 말라 있었다.

서울시는 한 번도 비둘기 수에 대한 통계를 내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줄었는지 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한 조류협회는 지난 2006년 현재 서울과 수도권에서 100만 마리가 넘는 비둘기가 서식한다고 추산했으나 공신력은 없다. 도시에서 먹을 것이 많아지고 기온도 따뜻하다보니 1년에 2~3차례였던 비둘기 산란주기가 6~7차례로 늘면서 집계 자체가 불가능해 졌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이렇게 늘어나는 비둘기 피해가 극심하다고 판단해 “도심 비둘기를 유해 조류로 분류하고,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리도록 ‘야생 동식물 보호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사실상 무산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비둘기 수를 줄이겠다는 취지에서 불임제를 혼합한 먹이를 주는 아이디어도 나왔었지만 제안 차원에 그쳤다”며 “시 차원에서 비둘기를 잡거나 약을 푼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