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묘소를 99세 며느리가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시영(1869~1953)은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6형제의 다섯째로 임시정부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건국 주역 중 한 명인 그의 묘소가 방치돼 있다는 소식은 우리가 나라의 토대를 놓은 선조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닫게 했다. 우리는 이시영 부통령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만들고 초기를 이끈 사람들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한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은 '건국(建國)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이다. 독립선언서에 각 지역 대표로 서명했거나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지도자, 헌법을 마련한 필라델피아 회의 참가자 등 미국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등 초기 대통령들과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대법원장 존 제이,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 조지 메이슨, 새뮤얼 애덤스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들'을 성인처럼 떠받든다. 화폐 속 인물도 이들이 절반 이상이다.
미국 못지않게 고난에 찬 건국 과정을 거친 한국에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없다. 20세기 전반 한국사는 식민지, 분단, 전쟁 등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많은 지도자가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 위한 헌신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건국 60주년을 맞는 올해 우리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이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으뜸가는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일찍부터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던 그는 냉전이 시작되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나라세우기'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집권 말년의 실정(失政)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김성수 2대 부통령,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이인 초대 법무부장관 등 한국민주당 인사들도 이승만과 손을 잡고 대한민국 건국에 적극 참여했다. 임시정부 요인인 이시영 초대 부통령과 신익희 2대 국회의장, 광복군 지도자였던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지청천 무임소장관도 힘을 보탰다. 미군정 민정장관으로 정부 수립을 뒷받침한 안재홍이나 초대 감찰위원장을 맡은 국학자 정인보 같은 이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평생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힘써 대중에게 널리 존경받는 지도자들이었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어떨까? 대한민국 건국을 1948년 8월 15일의 '사건'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들'에서 이들을 배제하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을 조선왕조 말에 시작된 근대국가 수립 운동이 반세기 만에 성과를 거둔 '과정'으로 이해하면 달라진다. 대한민국의 방향과 일치하고 거기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을 마지막 순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빼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 헌법 전문(前文)은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우리 사회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감대를 만들어가야 할 문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광복 직후 지도자들의 노선 차이와 주도권 경쟁 때문에 빚어진 정치적 분열을 역사적 관점에서 통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다시 확인하고 강화하게 된다. 이제 선진국의 문턱에 서게 된 우리는 온 국민이 우러러 존경하는 '나라의 뿌리'를 가질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