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못지않게 더웠던 6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사무소 뒤 주택가 언덕길. 한걸음 한걸음 디딜 때마다 땀이 쏟아졌다. 큼지막한 단독주택들이 널찍하게 들어선 첫번째 마을을 지나고 나니 산자락에 좁은 골목길을 내고 작고 허름한 집들을 오밀조밀 세운 두 번째 마을이 나타났다.
그 마을을 지나고 다시 10여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종로 최고의 오지'라 불리우는 부암동 '도깨비골'의 유일한 집, 이춘복(82) 할아버지와 윤동식(71) 할머니의 보금자리가 나왔다.
집 뒤로 계곡물이 흐르고 앞에 우뚝 선 산자락을 따라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배경으로, 초인종겸 경비원 노릇을 하는 네 살배기 수컷 풍산개 '풍돌이'가 우렁차게 짖는다. 여기가 서울, 그것도 도심 한가운데라는 종로구라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는다.
이곳에 지난 3월 17일 처음으로 수돗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로구는 "관내 모든 가정 집에 수돗물을 공급하겠다는 오랜 숙원 사업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다. 비비추와 황매화가 곱게 피어 있는 안마당에 만들어진 지 한 달 반이 된 수도꼭지가 세워져 있고, 옆에는 서울시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계량기 뚜껑이 눈에 띄었다.
"물 잘 나오죠?" 점검차 나온 부암동 사무소 이승규 주임이 묻자 이춘복 할아버지는 수도꼭지를 돌려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대야에 담고 씩 웃어보이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윤동식 할머니는 손을 부여잡고 "너무 고맙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른네 살 때 열한 살 아래의 할머니와 결혼하면서 이 집을 처음 지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산에 가서 직접 흙 퍼와서 '브로꾸(벽돌)' 찍어내고 일일이 쌓아서 만들었다"며 "지금은 이 집밖에 없지만 옛날에는 주변에 집이 수십 채 있었던 꽤 큰 마을"이라고 회고했다. 툇마루 뒤의 방에는 지금은 장성한 4남매의 어렸을 적 사진과 그들이 낳은 손주 8명의 사진이 골고루 붙어 있는 집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흐르던 시간이 딱 멈춘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하필 왜 속칭 '도깨비골'이 됐을까?
"예전에 요 옆집에 이쁘장한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아래 산동네 연탄집 대학생 아들한테 연탄배달을 부탁했다는 거야. 그런데 연탄 열 장을 지게에 진 학생이 길이 너무 가파르고 머니까 '내가 도깨비한테 홀렸지 홀렸어' 이랬대.(웃음) 그 이웃집들은 이후 모두 헐렸지."
그후 노부부의 집은 '명소 아닌 명소'가 됐다. 인왕산 등산로 샛길이 바로 집앞에 있고, 산자락 위에는 서울성곽이 지나간다. 가장 친근한 이웃은 등산객들과 군인들이다. 매년 겨울이면 지역 인사들이 가장 먼저 연탄을 들고 찾아오는 '배달 1번지'이기도 하다. 전화와 전기는 20여년 전에 놓여졌지만, 정작 매일 마셔야 하는 수돗물을 끌어오지는 못했다.
그동안 할아버지가 손수 계곡물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받아왔다. 하지만 계곡이 얼어붙는 겨울철이면 아래 동네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와야 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빨래하거나 밥을 지을 수도 없었다. 이런 산골짜기에 지난 3월 놓인 수도는 노부부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올해는 1908년 뚝도수원지에서 처음 수돗물을 만들어 4대문 안과 용산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시작한, 통수(通水)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하지만 서울에는 아직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 있다. 지난 1월에는 서초구 방배3동 618번지 일대 48가구에 공동수도가 놓이면서 수돗물의 혜택을 받게 됐다. 서울 동쪽 끝자락인 강동구 고덕1동 584번지 일대 15가구의 경우 상수도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며, 오는 6월쯤이면 수돗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고덕1동 480번지 일대 4가구는 인근이 사유지인 관계로 상수도관 공사 계획이 잡혀 있지 않아 당분간 서울 시내 마지막 '미급수 지역'으로 남아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