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갤러리 드리' 라는 작은 화랑에 갔다가 사무실에 보관돼 있는 그림 한 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이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과 너무 닮았거든요. 스페인의 팝아트 작가 안토니오 드 펠리페(Antonio de Felipe·43)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애니콜과 행복한 눈물(Happy Tears Avec Anycall)'이라는 작품입니다. 머리 색깔만 파랗게 바뀐 '행복한 눈물'의 바로 그 여인이 'Anycall(애니콜)'이 새겨진 폴더 휴대폰을 왼손에 들고 통화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입니다. 50ⅹ50㎝ 정사각형으로 실제 '행복한 눈물'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크기이지만, '행복한 눈물'을 패러디한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갤러리 측은 5월 8~30일 전시할 '누보팝(Les Nouveaux Pop)'이라는 그룹 전시에 걸기 위해 이 그림을 사무실에 보관 중이었습니다. 안토니오 드 펠리페는 작년 가을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소마미술관에서도 전시를 한 적이 있는 스페인의 인기 팝아티스트입니다. 팝아트는 시대의 화두를 담되, 누구나 한번 척 보면 알 수 있는 '쉬운 이미지'를 사용하는 미술입니다. 1960년대에 앤디 워홀은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똑같이 먹는 코카콜라 캔을 그려 미국이 자랑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리히텐슈타인은 한번 보고 버리는 싸구려 만화 잡지에 나오는 이미지를 가공해 현대사회를 풍자했습니다.

안토니오 드 펠리페의 아크릴화 '애니콜과 행복한 눈물'

21세기의 '뉴 팝아티스트' 안토니오 드 펠리페 역시 한국 전시에 선보일 그림 속에 한국의 핫이슈를 넣어 사회를 풍자합니다. 작가는 한국 전시에 어떤 그림을 내놓을까 고민하던 작년 말, 스페인 현지에서 만난 한국 미술계 사람들에게 지금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리히텐슈타인 그림 한 점에 나라가 뒤집혔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바로 인터넷을 통해 '행복한 눈물' 이미지를 구했고, 이를 패러디했습니다. 애니콜 휴대폰을 들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 여인은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일까요? 혹시 삼성 측에 전화를 걸어서 "어머, 어쩌면 좋아요, 저 때문에 괜한 마음고생을 하셔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주말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국제아트페어(CIGE)에 갔다가 리히텐슈타인을 패러디한 작품을 또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작가 이이남(39)이 리히텐슈타인의 유명한 그림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 시리즈를 전시 중이었지요. 올해 초 서울옥션에서는 노란 머리의 여인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판화 '우는 여인(Crying Girl)'이 치열한 경합 끝에 추정가(4000만~5000만원)를 훨씬 넘는 가격인 61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특검 수사 결과 '행복한 눈물'은 삼성의 소유가 아니라고 판정 났지만, 이제 그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런 그림들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성(혹은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살 뻔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리히텐슈타인은 이미 충분한 프리미엄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톱스타의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고 투자의 귀신이 사는 주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듯,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인과 관련된 작가는 그 가치가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미술은 '무형(無形)의 가치'에 값을 매기는 예술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특급 컬렉터의 경우 "누구 작품을 샀다더라"는 소문만 나도 해당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대미언 허스트를 키워낸 세계 정상급 컬렉터 찰스 사치가 중국 현대미술품을 산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2~3년 전, 베이징에 있는 화랑과 작가들은 앞다퉈서 "우리 스튜디오에 찰스 사치가 다녀갔다"고 소문을 퍼뜨리곤 했습니다. 소문만으로도 작품의 가치가 확 오르기 때문이지요. 홍라희 전 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특검의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리히텐슈타인 파장(波長)'은 한동안 계속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