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는 맛있는 언어다. 어느 나라에서든 사투리는 ‘지역감정’ 때문에 본질을 외면당한 채 차별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역’만 남겨두고 ‘감정’만 빼면, 듣는 귀는 항상 즐겁고 정겹다. 최근 뉴질랜드 신문과 영국 방송은 ‘독특한 뉴질랜드식 영어발음’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영국·미국·뉴질랜드의 언어학자 및 수학학자들이 모여서 19세기 이후의 뉴질랜드식 영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는데, 영국 BBC와 뉴질랜드 언론들이 연구결과를 동시에 발표한 것이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초창기에는 영어 발음과 악센트 때문에 힘들었다. 한국에서 받은 영어교육은 철저하게 미국식 영어였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미국식 영어를 저급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민초기에는 발음과 악센트를 미국식에서 영국식으로 교정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썼다. 버터를 많이 바르고 혀를 심하게 굴리는 미국식 발음에서, 혀를 좀 더 딱딱하게 굳히다 보니 처음에는 좀 어색했다. 게다가 키위 영어는 몇 가지 발음에 있어서는 아주 독특해서 발음 공부에 큰 공을 들여야 했다.

일러스트 박상철

그렇다면 뉴질랜드의 사투리는 어떨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뉴질랜드식 영어(흔히들 Kiwi English라고 함)는 몇 가지 발음에 있어 영국 영어의 사투리(dialect)에 해당하지만, 뉴질랜드 내에서는 전체적으로 통일된 발음과 악센트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서 뉴질랜드는 사투리가 없고 표준어만 있다.

뉴질랜드의 지형을 잘 아는 필자로서는 이 같은 이야기에 쉽게 수긍하기 힘들었다. 뉴질랜드는 면적으로 친다면 한반도의 1.2배, 대한민국보다는 2.5배에 해당할 만큼 넓다. 게다가 남북으로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남섬과 북섬은 뱃길로 두세 시간씩이나 떨어져 있다. 남섬의 경우 동서가 높고 긴 산맥으로 나눠져 있다. 지리적으로 본다면 사투리가 분명 나올 법한 형세다. 그런데도 뉴질랜드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투리가 없다고 한다.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키위 영어의 사투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뉴질랜드의 사투리에 대한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

뉴질랜드 신문들과 영국 BBC 인터넷판은 지난 2월 8일 “키위 영어는 한 가지 표준어를 사용 중이며, 그것은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는 기사를 소개했다. 영국·미국·뉴질랜드 언어학자 및 수학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뉴질랜드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스코틀랜드 사투리와 아일랜드 사투리가 각각 25%씩, 나머지 절반은 런던 사투리(cockney) 및 북서부 사투리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뉴질랜드 사람들은 지역별로 발음이나 악센트에서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체적으로 통일된 표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왜 뉴질랜드 영어는 사투리가 없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 이전에, 키위 영어가 미국식 영어나 영국식 영어와 어떻게 다른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키위 영어는 ‘e’를 ‘에’보다는 ‘이’에 가깝게 발음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에’와 ‘이’ 중간에 해당하는 발음이라고 보면 된다. 즉 ten을 ‘텐’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거의 ‘틴’에 가깝게, seven은 거의 ‘시븐’으로 발음한다. 또 ‘a’는 ‘에이’ 대신 ‘아이’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면 ‘today’는 ‘투데이’라기보다는 ‘투다이’로 발음하는 식이다.

자음의 경우도 ‘r’를 우리말로 치면 거의 ‘아’로 발음한다. 즉 ‘here’는 ‘히어~ㄹ’가 아니라 ‘히아’에 가깝다.

사실 이민 초창기에는 오히려 키위 영어를 삐딱하게 들었다. 미국식 버터 맛이 쉽게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질랜드 영화나 방송을 통해서 미국 영어와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늘다보니, 어느새 사무적이고 딱딱한 영국식 발음이 고향의 사투리를 듣는 것처럼 편해졌다. 미국 버터 맛을 조금씩 잊으면서 어느새 미국식 발음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고, 영국의 사투리에 해당하는 독특한 키위 영어는 갈수록 정겨웠다.

물론 뉴질랜드 사람들도 필자가 미국식도 아니고 영국식도 아닌 어정쩡하게 발음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즐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기분일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국 방송가에서 사투리 때문에 인기를 끈 미국인 하일(로버트 할리), 프랑스인 이다도시, 일본인 미즈노 준페이가 떠오른다.

뉴질랜드 일간지 뉴질랜드헤럴드와 영국 BBC 인터넷판 기사에 따르면, 이같은 몇 가지 독특한 발음을 가진 뉴질랜드 영어에 대해 영국·미국·뉴질랜드의 언어학자 및 수학자들이 관심을 가졌고, 5년 전부터 꾸준히 19세기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온 사람들의 영어가 어떻게 발전되고 변화했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그들은 뉴질랜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를 왜 ‘Fush and Chup’이라고 발음하는지 의문을 갖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독특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뉴질랜드에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진들은 1850년 이후 뉴질랜드로 건너온 영국인들과 그 후손들의 언어를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이민 1세대의 경우에는 제각각 영국의 지방 사투리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뉴질랜드에도 출신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발음과 악센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민 온 지 50여년 만에 이 같은 다양한 발음과 악센트는 하나의 표준어로 통일돼 버렸다.

이런 결과에 대해 영국의 에든버러대학 물리학자 리처드 블리드는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온 1세대 때는 다양한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발음을 접하면서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면서 “그 당시 이민자들은 많지 않은 데다 전국적으로 철도시설이 잘 건설돼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표준어가 급속히 보급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당시 이민자수가 많지 않아서 지역별로 독특한 발음이 사투리로 정착되기 어려웠던 데다 교통까지 발달해서 발음체계가 혼용되었다는 설명이다.

그 기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중국인들을 떠올리게 됐다. 이번 연구결과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뉴질랜드에 사투리가 없는 것은 중국인들의 도움이 크다고 봐야 한다. 뉴질랜드는 이미 190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철도와 도로가 잘 발달돼 있었다. 그것은 중국 이민자들의 공로였다. 중국의 이민역사는 180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됐는데, 초창기 중국인들은 대부분 뉴질랜드의 금광이나 철도 및 도로 건설을 위해 대거 유입됐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다 보면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이라고 여겨질 만큼 인적이 드문 곳까지도 도로가 잘 건설돼 있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모두 중국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됐다고 한다. 만약 헐값의 풍부한 중국인 노동력이 없었다면 뉴질랜드의 철도와 도로 건설은 더뎠을 것이고, 영국의 뉴질랜드 이민 초창기 사투리들도 통합되지 않고 그 면모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다소 무리한 발상이기는 해도 중국인이 뉴질랜드의 언어통폐합에 일조한 것은 분명 인정해줘야 한다.

현재 전 세계 패권을 쥔 미국의 국력은 키위 영어에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요즘 뉴질랜드 TV에서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미국식 발음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미국식 영어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다. 아래 세대로 갈수록 독특한 키위 영어는 사라지고 있다. 더욱이 다인종 국가인 뉴질랜드 특성상 학교에서도 가능한 인터내셔널(영국식에 근거를 두고 미국식 발음을 상당 부분 채용한) 발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뉴질랜드에서 영어를 배우면 미국인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괴담은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다.

/ 차 병 학 | 서울대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 기자,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코리아 편집장, 현재 크라이스트처치코리아 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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