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의 특급호텔 벨라지오 부주방장을 그만두고 금강산 아난티 리조트 총주방장으로 가는 요리사 최치원씨. 니콜 키드먼, 힐러리 클린턴 등이 그의 단골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로 꼽히는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Bellagio)'에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워런 버핏, 아랍 왕족 등 초특급 VIP를 단골로 모시던 한국인 부주방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것도 '세상의 오지'라 할 금강산에 새로 문 여는 호텔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라면 "제정신 아니다"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는 5월 개장하는 '금강산 아난티 골프&온천 리조트'의 최치원(崔致遠·39) 총주방장이 그 사람이다.

최 총주방장은 사실 '제정신 아닌' 일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다. 요리사가 된 계기부터 그렇다. 원래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공기업 감사실에서 일했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접대 받는 게 고역이었다. "체질상 술·담배를 못하고 고기도 싫어하거든요."

정직하게 땀 흘리는 직업을 찾고 싶던 차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던 기차에서 은인을 만난다. 사법고시에 패스하고도 지방의 작은 박물관 관장으로 일하는 분이었다. "그분은 '남들은 내 조건이면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생각하지만 내게는 하고 싶은 일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하시더군요." 기차에서 내려 당장 '직업의 세계'란 책을 샀다. 요리사가 유망해 보였다. 그는 해운대 동백섬에 있는 통일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동상 앞으로 소주를 사 들고 갔다. 이름이 같은 조상님 앞에서 두 시간을 펑펑 울면서 결심했다. '세 살 어린 아이도 이름을 들으면 아는 요리사가 되겠다. 조상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

최치원씨가 할리우드 스타 니콜 키드먼을 위해 특별히 만든 디저트‘마릴린 먼로의 추억’.

요리학원으로 달려갔다. 원장은 "다니던 직장이나 잘 다니라"고 퇴짜를 놨지만 매달렸다. 보름 만에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 부산 웨스틴조선호텔에 자기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과 나란히 막내 요리사로 입사해 10년을 밤낮 없이 일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았거든요. 말린 과일을 넣는 요리라면 과일을 화이트와인에 불려서 넣어 봤죠. 처음엔 야단도 맞았지만 결국 나중엔 인정받았습니다."

그를 눈여겨본 독일인 총주방장이 시드니에서 온 쉐라톤호텔 총주방장에게 그를 소개했고, 2003년부터 시드니 쉐라톤호텔과 샹그릴라호텔에서 일하게 됐다. 이때 호주 출신 배우 니콜 키드먼을 단골로 만들었다. 그녀를 사로잡은 건 '마릴린 먼로의 추억'이란 디저트였다. 바람에 날린 치마 밑으로 미끈한 다리를 드러낸 여배우의 이미지가 담겼다. "키드먼이 '동화적 요소'를 좋아하거든요. 누구 때문에 준비하는 건 아니고, 평소 개발한 새 음식을 유명 인사가 왔을 때 내놓는 거죠. 그랬다가 반응이 좋으면 단골이 되는 거고."

요리에 아이디어를 담자 단골이 늘어났다. "터프한 배우 러셀 크로는 식성도 비슷해 햄이나 소시지를 넣은 샌드위치를 즐겼죠. 추상화를 좋아하는 하워드 전 호주 총리에게는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회화 '기억의 영속성'에 등장하는 축 늘어진 시계처럼 음식을 담아냈죠."

최씨는 2005년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주방 서열 2위인 부주방장(Assistant Executive Chef)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실 벨라지오에서 셀린 디온이나 휘트니 휴스턴 정도는 옆 호텔에서 공연하는 가수에 불과하죠…."그가 '인정'하는 VIP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빌 게이츠도 햄 샌드위치를 즐겼어요. 워런 버핏은 스테이크처럼 단순한 음식을 즐기지만 로즈메리 등 향신료를 넣어 맛을 낸 최고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뿌려 달라고 주문했고요. 얼마 전 사망한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이 진짜 미식가였죠. 음식을 아주 조금씩, 풀 코스로 즐겼어요. 와인도 600~700달러짜리 고급만 마셨고. 힐러리 클린턴은 제가 만든 푸아그라(foie gras·거위 간) 요리를 보고는 저를 불러 달라더니 아시아인인 걸 보고 놀라더군요. 그러곤 나중에 가족을 데려올 테니 똑같이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

그가 VIP들 함께 하는 '그 좋은 자리'를 두고 금강산으로 떠난 건 고국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이다. "외국에 너무 오래 있느라 가족과 보낸 시간이 무척 적었어요.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죠."

최 총주방장은 금강산의 호텔에서 송이, 더덕, 생선 등 북한산 식재료를 이용해 새 메뉴를 창조할 계획이다. "아름답고 맛있어야 좋은 요리입니다. 그 위에는 요리사의 철학과 개성을 드러내는 요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요리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요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