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청와대)의 정국 현안에 대한 입장” “○○그룹 ○○○회장, 대운하 참여 적극 추진” “가수 출신 스타 ○○○, 안하무인으로 빈축”….
시중에 나도는 사설 정보지를 일명 ‘찌라시’라고 부른다. 청와대 인사의 뒷배경이나 재벌 총수의 기업 승계, 연예인 스캔들까지 온갖 내용이 담긴다. 정·재계는 물론 연예계에서조차 찌라시가 홍수처럼 쏟아지니 가히 ‘찌라시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지난 1월 가수 나훈아씨를 기자회견까지 자청하게 만들었던 ‘괴소문’도 수개월 전부터 찌라시에서 나돌았고, 한 매체에 보도된 뒤 소송까지 당했던 유명 인사의 이혼설 발원지도 찌라시였다. ‘삼성그룹 비자금설’이나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설’ 같은 이슈도 공식 거론되기 전부터 찌라시 시장에 먼저 ‘신고식’을 치렀다.
찌라시에 대해 “악성 루머와 쓰레기 정보의 발원지” “출처도 없는 음성 정보”라는 비판도 나온다. 검찰이 사생활 침해 등을 이유로 단속에 나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찌라시를 챙겨 읽는 ‘찌라시 독자층’이 두터운 것도 사실이다. 기업체는 물론이고 국가 정보기관이나 사정기관, 연예계까지 예외가 아니다. 재계에선 허위 사실이더라도 ‘찌라시에 떴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갖고, 정치권에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일부러 흘리며 ‘찌라시 정치’를 하는 이들도 나온다. 찌라시는 정보 혁명 시대에 인정받아야 할 또 하나의 권력일까. 아니면 정보 과잉시대가 만들어낸 ‘카더라’ 통신에 불과한 것일까.
찌라시 정보의 생산엔 어떤 사람들이 가담하며, 어떻게 정보가 가공되고 어떤 채널을 통해 유통되는지, 또 그 유형은 시대별로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Weekly Chosun이 밀착 취재했다.
누가 어디서 만드나
기업체 정보담당ㆍ前 국정원 직원 등 매주 모임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열리는 모임들이 있다. 참가 인원은 대개 10~15명 선. 정보 시장에 늘 로그인하고 있는 이들은 일명 '선수'라고 불린다. 출신도 가지각색이다. 기업체 정보 담당, 전직 국정원 직원, 사정기관 관계자,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비서관, 기자 등이다. 정보가 많을수록, 내용이 고급일수록 '프리미엄급'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기업체 직원의 경우 정보팀, 대외협력팀, 기획팀, 분석팀, 관제팀 소속이 참여한다. 사정기관이나 정보기관 관계자의 경우, 전직이 많지만 현직 직원도 포함된다고 한다. 기자들은 군소 주간지 소속 기자들이 주로 참여한다. 국회의원들이 청문회 때 폭로하는 내용 중 상당수가 보좌관이나 비서관이 이런 정보 모임에서 얻은 것에 기반한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이 모임에 들어갈 순 없다. 한 기업체 정보팀 직원은 "처음 몇 주일간 신참자가 갖고 오는 정보를 심사한 뒤 모임의 멤버로 받아준다"고 했다. 정보 모임은 철저히 '주고 받는' 관계로 이뤄진다. 정보 수집이나 가공 능력에 있어 '함량 미달'인 사람은 '아웃'이다. 참석자들은 지연이나 학연 같은 인맥으로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다.
정보 모임은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의 룸에서 대낮에 두세 시간 가량 열리는데 저녁 식사를 겸해 새벽까지 토론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모임 참석자 중 고참을 '여의도 편집장' '광화문 편집장'이라고 부른다.
생산 1단계
6-~70가지 정보 모아 하나로 묶어내
정보 모임의 참석자들은 각자 4~5줄짜리 정보 4~5개씩을 갖고 모인다. 참석자가 15명이라 할 경우, 60~70여개의 정보가 모인다. 일단 정보지 문건 한 개를 만들 분량이 나온다는 말이다.
처음 이곳에 모인 정보는 대개 사실 확인이 안 된 ‘첩보’ 수준의 것들이다. 참석자들은 사안별로 정보를 교환하며 내용을 교차 확인한다. 소위 ‘그림을 그리는’ 단계다. 부족하다 싶으면 각자 보충 취재를 한 뒤 다시 정보를 교환한다.
모임에서 오고간 대화 내용을 기록하는 ‘서기’를 두기도 하지만 아닐 때도 많다. 이 자리에선 자유롭게 얘기만 나눈 뒤 참석자들이 개별적으로 문서를 정리하는 식이다. 나중에 업계에서 나도는 정보지가 내용은 거의 비슷하되 말투나 토씨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건 이 때문이다.
각 기관의 정보 담당자들은 1차적으로 내용을 ‘첩보’와 ‘정보’로 구분한 뒤 추가 확인 과정을 거쳐 상부에 보고한다. 이때 내용은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등급별로 분류된다.
생산 2단계
한 사람이 여러 모임 참여하며 정보 재가공
정보 모임 A 에 속한 사람이 또 다른 모임 B나 C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다양한 내용이 합쳐지고 정리된다. 한 기업체 정보담당은 “정보가 재가공되는 과정을 통해 내용의 표본 오차를 줄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정보가 흐르는 과정에서 일찍 외부로 새어나가는 수도 있다”고 했다. 때문에 사실 여부가 명확지 않더라도 일단 ‘날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대개 찌라시의 ‘기사’는 한 줄짜리 짧은 제목과 두서너 개의 문단으로 이뤄진다. 찌라시 한 개당 분량은 대개 A4 용지 10~20여장이다. 하지만 가공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초벌구이’나 ‘재벌구이’는 분량이 수십 장에 달한다.
여러 곳에서 만든 정보들이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글꼴이나 모양새, 말투를 조금씩 바꾼 ‘아류작’이 나돌기도 한다. 업데이트를 하지 않고 과거에 이미 돌았던 찌라시 내용을 그대로 컴퓨터상에서 덧붙여 분량만 비대해진 것도 생겨난다.
정리 단계
'공장' 거쳐 유료화…정보 '물물교환'도
여러 개의 정보 모임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유통되던 정보는 소위 ‘공장’이라고 불리는 사설 정보지 업체를 거치면서 ‘유료화’된다. 일종의 찌라시 기지 역할을 하는 이곳은 개인일 수도 있고, 몇 사람이 모인 회사 형태일 수도 있다.
시장에 나도는 찌라시 정보를 확인·가공하는 과정엔 프리랜서 작가들이 개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 연예인의 스캔들이 나오면 연예 담당 프리랜서나 기자를 통해 사실을 확인해가는 식이다.
사설 정보지 업체는 시중에 떠다니는 정보를 돈으로 구매하기도 하지만, 이미 확보한 정보를 또 다른 정보와 바꾸는 '물물 교환' 과정을 통해서도 정보를 수집한다. 각기 다른 사설 정보지 업체의 찌라시 내용이 거의 70% 정도 겹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사설 정보지를 본다는 한 사람은 "업체를 통해 일부 파일이 합쳐지고 유통 기간이 지난 정보는 삭제되면서 최종 정리된다"며 "업체들은 저마다 '우리는 근거 없는 루머가 아니라 알짜배기 고급 정보만을 취급한다'고 홍보한다"고 했다.
판매단계
구독료 1년에 300만~600만원
‘경영 보고서’나 ‘종합 분석지’ 같은 형태를 띠는 이들 사설 정보지는 대개 격주에 한 번씩 나온다. 구독료는 한 달에 30만~50만원, 혹은 1년에 몇백만원을 받는다. 대표적 사설 정보지는 H사가 운영하는 것으로, 우수 고객에 한해 1년 구독료가 300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한 신문이 CEO를 대상으로 만들어 파는 정보지는 이보다 비싼 600만원에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EO 리포트의 경우, 암호를 넣어 파일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다. 복사하거나 인쇄할 수 없다. 앞쪽엔 정보지 내용의 목차를 써놓았고, A4 용지로 20쪽이 안 된다. 한 업체가 만든 사설 정보지 말미에 경쟁사의 정보가 별첨으로 붙여지기도 한다. A사는 B사의 것을, B사는 A사의 것을 끼워팔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산 단계
기업ㆍ정보기관이 주 고객…공급자가 수요자
정보 모임에서 오가던 정보가 시중으로 흘러나가는 채널은 다양하다. 초기 정보 모임의 참석자를 통해 정보가 흘러나가는가 하면, 업체를 통해 작성된 문건이 팔려나가기도 한다. 유료화된 정보지 내용이 다시 알음알음 무상으로 외부에 전달되기도 한다.
이들 정보지를 구매하는 대표적인 조직은 기업체다. 이 밖에 국가 사정기관, 정보기관이나 개인도 구독한다고 한다. 애초에 정보 모임에 직원을 투입시켜 정보 생산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기관이 몇 개의 정보 생산·유통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상품화된 정보를 다시 구입하는 셈이다. 정보지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겹쳐진다는 말이다.
사설 정보지를 흔히 ‘증권가 찌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증권가에서 주식 종목을 알려주는 문건이 유통된 데다, 정보에 따라 시황이 뒤바뀌는 증권가에서 찌라시가 실시간 빠른 속도로 유통됐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해 찌라시가 전달·유포되고 있다. 2005년 사설 정보지에 대한 대대적 검찰 단속이 있은 뒤, 메모리 장치를 통해 파일을 주고받거나 아예 종이 묶음을 보여주고 바로 회수하는 전달 방식도 나왔다.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이승선 교수는 “찌라시 시장은 정보를 구하려는 사람뿐 아니라 정보를 유포하는 사람, 정보를 허위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시장이자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한 증권가 직원은 "유언비어 유포로 인한 피해는 막아야겠지만, 찌라시 시장을 단속할 경우 더욱 은밀한 곳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폐해를 낳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용학 교수는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고급 정보는 전달되는 곳이 제한될수록 그 가치가 커진다"며 "정보가 지금보다 더 많이 쏟아지는 시대가 오더라도 '나만의 정보'에 대한 욕구가 있는 한 찌라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