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주간 베스트 184위, 역사·풍속·신화 주간 베스트 5위(인터넷 교보문고 집계, 3월 5주 기준). 3월 24일 출간된 교과서포럼 '한국근·현대사 대안교과서'의 흥행 성적표다. 딱딱한 인문과학서, 게다가 '교과서'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것치곤 나쁘지 않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신문에서 서평란이 아닌 학술 면과 오피니언 면에 실리며 이목을 끌고 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바로 쓰겠다”는 집필진의 의도와는 별개로 “친일 변호 책자” “일본 후소사 교과서의 한국판” “집필자 중 역사 전공자는 한 명도 없는 책”이라는 비난의 뭇매 속에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나온 지 2주째인 4월 7일 저녁, 집필에 참여한 3명의 교수와 마주앉았다. 집필 및 책임편집을 맡은 이영훈(57)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일영(48)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세중(62)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다. 출간 이후 언론을 위해 집필진이 모인 것은 처음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책 만들 때도 쉽진 않았지만 나온 후 겪은 마음 고생이 더 심하다”고 했다. 교과서 집필에 얽힌 뒷얘기와 비판에 대한 반론, 독자에게 바라는 말 등을 주제로 진행된 2시간여의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왼쪽부터) 김일영 교수, 이영훈 교수, 김세중 교수. photo 조영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비판적 반응 어느 정도였나
학문적 비판은 없고 몇몇 부분에만 집착
욕설 가득한 협박편지와 전화도 매일 몇 건씩

사회자 :출간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책이 나온 지 2주가 흘렀습니다. 주위 평가는 어떻습니까.

김세중 : 며칠 전 모 경제지 논설위원이 저희 앞으로 우편물을 보내왔어요. 그 신문에서 발행하는 논술 지면에서 우리 책 이야기를 한 개 면 이상 특별 편성했더군요. 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고요.

이영훈 : 오늘 모 일간지 논술 지면의 칼럼 주제도 우리 책이더라고요. 논조는 비판적이었지요. 어쩌다 보니 우리 책이 논술 쪽에서 갑론을박의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김일영 : 책이 나온 후 저희가 겪는 불합리한 일에 대해 말하자면 끝도 없어요. 제발 어디 좀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지요. 이번 일로 우리 사회 곳곳의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영훈 : 우리 책을 꼼꼼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새로운 가설이 눈에 띌 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일부에선 전체 분량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몇몇 부분에 집착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김일영 : 우리 책과 관련, 가장 많은 공격을 받는 게 친일파 관련 부분이에요. ‘친일파를 근대화의 주역으로 미화했다’는 비판이지요. 최근의 친일파 논란은 과거 냉전 시대의 ‘빨갱이’ 논란과 닮은꼴이에요. 평가 주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거나 논박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외면한 채 국민 정서를 등에 업고 우리를 수세로 몰고 갈 수 있는 일제강점기 관련 언급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김세중 : 사실 일제강점기 부분은 출간 전부터 논란이 되겠다 싶었어요. 일제강점기에 대한 평가가 다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사람조차 새로 알게 된 내용이 많았으니까요. 그런 접근방식을 처음 접한 일반인에겐 낯설 수밖에 없지요. 의대 교수인 제 친구조차 “일제강점기 때 우리 사회에 근대성이 도입됐다”는 언급에 대해 “그럼 독립운동가들은 해선 안 될 짓을 한 거냐”고 반문하더군요. ‘근대화 운동과 독립운동은 공존할 수 없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사회자 : 책을 둘러싼 여론 중 상당 부분이 비판적인 게 사실입니다. 노골적으로 혹평을 일삼는 독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영훈 : 책이 나온 이후 매일 하루에 한두 건씩 폭력 전화와 편지가 와요. 예전엔 편지를 읽다 욕설이 나오면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는데 오늘부터는 모으기로 했어요. 이것도 다 사료지, 싶어서.

김일영 : 전화의 경우 본인을 밝히긴 하지만 신뢰하긴 어려워요. 한번은 성균관대 졸업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이가 전화를 했어요. 책을 읽어봤느냐고 했더니 “미국 안 갔다 오면 미국에 대해 말 못하냐”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책부터 읽고 이해 안 가는 부분을 물어보면 답변해주겠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턴 대놓고 욕설을 퍼붓더라고요. 익명성 뒤에 숨어 폭력을 행사하는 거죠.

김세중 : 얼마 전엔 어떤 사람이 모 주간지 기자라며 불쑥 전화해선 나더러 친일파 아니냐고 해요. 하도 어이가 없어 “내 힘으로 세 끼 밥 벌어먹고 사는데 뭐가 아쉬워 친일파를 하겠느냐”며 도리어 따졌습니다. 제가 예전에 일본 문부성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왔어요. 정식 과정을 밟아 추천 받고 다녀왔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그 경력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영훈 : 극성 비판론자가 있고 일부 언론 매체가 연일 우리 책에 대해 아주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가 많이 차분해진 느낌입니다. 다만 대학이나 국사학계 등 정작 책에 대한 의견을 내놓아야 할 곳이 너무 조용해요. 학문적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일부 매체의 신경질적 반응이 있을 뿐이지요. 이게 우리 사회의 근본적 지성의 한계가 아닌가 싶어 씁쓸합니다.

김세중 : 얼마 전 우리 대학 학보에 동료 교수가 우리 책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원고지 9매 정도 분량 전체가 비난 일색이었어요.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관점의 균형은 갖추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어 아쉬웠습니다. 총선 후 분위기가 좀 차분해지면 학자들끼리 모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길까요? 교과서포럼에서 그런 자리를 만들 수도 있겠지요.

외부의 집필진 비판에 대한 비판
근·현대사 해석은 역사학자 아니라도 가능
국사학자들에게 집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해

사회자 : 책을 둘러싼 대표적 비판 중 하나가 “집필자 중 역사학 전공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영훈 : 고대사는 특정 문자나 유물, 사료 등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인정됩니다. 그렇지만 근·현대사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친 방대한 사료를 분석하는 작업이어서 특별히 훈련 받은 집단이 있을 수 없어요. 각 학문이 서로의 영역을 활짝 열고 교류해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특히 국사학은 지나치게 폐쇄적이에요. 저만 해도 국사학 관련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게 1984년이니 올해로 25년째인데 국사학계는 제 연구 성과에 대해 철저하게 무반응으로 일관합니다. 이번 책을 내면서도 수많은 국사학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 당했어요. 우리와 함께 책을 쓸 만한 용기를 지닌 분이 없었던 거지요.

김일영 : 예전에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만들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북한 현대사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한 후배 국사학자에게 논문 게재를 요청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 당했어요. “아이고, 형님. 나 죽일 일 있소. 취지는 알겠지만 거기에 글 실으면 학계에서 쫓겨납니다” 하더군요. 학계에선 늘 있는 고질적인 문제지요. 그렇지만 내용은 보지도 않고 집필진 구성만 갖고 비판하는 건 치졸합니다. 대학도 과 단위의 벽을 넘어 ‘통섭’으로 나아가는 세상에 국사학만 예외일 순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현대 정치사를 전공한 저 같은 사람은 이제까지 뭘 한 겁니까.

‘근대화 강조’비판에 대한 비판
근대화 없이 어떻게 오늘의 민주주의 이뤘겠나
쿠데타에 의한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봐야

사회자 : 책 내용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비판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김세중 : 다른 건 몰라도 근대화 부분에 대한 비판은 해명을 좀 해야겠어요. 근대화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세계 각국 공통으로 절체절명의 과제였습니다. 특히 북한과 대치 관계에 있던 우리 사회는 그 필요성이 더욱 절박했지요. 근대화에 실패한 국가는 안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일본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 역시 더딘 근대화가 그 이유였고요. 근대화가 완성돼야 민주주의에 이를 수 있고 정권이 창출될 수 있는 건데 비판론자들은 왜 근대화만 유독 강조했느냐고 합니다. 그것만큼 절박하고 중요한 과제가 없는데도요.

김일영 :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대화되지 않은 국가에 군인 등 쿠데타 세력이 개입해 정권을 잡은 후 근대화 과정을 이끄는 혁명이란 뜻이에요. 1978년 엘런 케이 트림버거(Ellen Kay Trimberger)라는 학자가 쓴 동명의 책으로 더 유명하죠. 터키 케말 파샤 정권이나 이집트 나세르 정권 등이 전부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야말로 ‘위로부터의 혁명’을 거쳐 근대화를 이룬 대표적 국가이거든요. 그런데 1980년대 ‘위로부터의 혁명’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던 이들조차 그 공식에 우리나라를 대입하는 데 거부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번 책을 통해 그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려 했어요.

이영훈 : 저는 우리나라의 근대화 혁명이 군부 쿠데타 세력의 정책뿐 아니라 개화 이후부터 서서히 축적돼온 사회적 잠재력 폭발로 비로소 완성됐다고 봅니다. 역사적 시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에서 동양방직을 세운 김성수 선생도 독립운동가로 볼 수 있어요. 일본이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체제 안에서 근대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해 공장을 키우고 나중에는 만주까지 진출했지요.

그가 일본에 건너가 신문 배달부 노릇을 하며 고학한 것도 독립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자는 게 아니라 밝고 긍정적으로 역사를 재해석하자는 거지요. 역경과 고난을 딛고 성장해온 우리 민족의 자양분이 해방 이후 국민국가 건설로 혁명을 이루어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겁니다.

고교생과 학부모를 위한 제언
개화파에 의한 기여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악의적 비판에 부담 갖지 말고 전체를 봐 달라

사회자 : 책을 접하게 될 고교생이나 학부모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이영훈 : 우리 책은 근·현대사의 주체를 ‘민족’이 아닌 ‘한국인’으로 놓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민족(민중)운동’이나 ‘민족(민주)혁명’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다른 교과서와 지향점 자체가 다릅니다. 민족을 강조한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강조되지만 우리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화나 건국 과정에도 주목하지요. 실제로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위로부터의 혁명’에 기대온 측면이 많고, 그런 관점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세력을 개화파로 본 겁니다.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는 이런 흐름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김세중 : 책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께는 서문을 찬찬히 읽어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또한 세간에 떠도는 한두 가지 악의적 비판에 휩쓸려 책 읽기에 부담 느끼지 말고 전체 내용을 봐 달라는 말도 하고 싶어요. 저희가 쓴 내용이 절대 진리는 아니니 의견 개진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사회자 : 교과서포럼의 추후 계획은 무엇입니까.

이영훈 : 미흡한 점을 계속 보완해 개정판을 내야겠지요. 또 5~6월쯤 저희 취지에 공감하는 교사 몇 분이 우리 책과 기존 근·현대사 교과서를 조목조목 비교, 분석한 자료집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책이 보다 많은 학생 손에 들려 현행 교과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는 보충 교재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시급한 과제예요.

김일영 : 사실 우리 책은 고교생이 읽기엔 다소 수준이 높은 편입니다. 학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학부모가 전체의 흐름을 꿰뚫기도 싶지 않죠. 책을 잘 활용할 수 있는 팁을 담은 소책자를 만드는 등 추후 개정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세중 : 머지않아 국사학계 쪽 분들과 이 책에 관한 학문적 담론을 나눌 수 있는 학술 세미나 등의 자리가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 weekly chosun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