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Sunny), 손님 오셨잖아. 어서 가봐!”

배가 볼록 나온 서양남자가 가게 안에 들어서자 매니저가 나를 재촉했다. 쭈뼛쭈뼛 그 남자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자 “헤이 베이비, 컴온(Hey baby, Come on)” 하며 남자가 손짓했다. ‘오·마이·갓(Oh my god)!’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매니저가 시킨 대로 남자 손님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곧이어 ‘외국인 전용바’의 룰(Rule)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부터 근무하기 시작한 ‘외국인 전용바’는 말 그대로 외국인만 출입 가능한 술집이다. 현재 서울 용산구 이태원 근처에서 성업 중이다.

지난 3월 19일, 한 아르바이트 채용 사이트에서 ‘외국인 전용바’를 검색해봤다. 5~6개 업체가 구인광고를 내놨다. 하나같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외국인과 프리토킹(Free talking)하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X외국인 전용바는 “영미권으로 유학 또는 영어 연수를 가기 전·후, 현지인과 영어로 대화하고 싶은 사람 환영”이라면서 “영어만큼은 반드시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사람은 지원하라”고 했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월 400만~600만원 이상을 벌 수 있고 초보자도 월 150만~300만원 수입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지난 4월 1일, 용산구 이태원의 외국인 전용바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한 여성이 외국인과 함께 업소로 들어가고 있다. photo 조영회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면접
“영어 배우고 싶은 사람 환영” 광고
 전화 걸자 “일단 직접 와봐라”

같은 날 오후 8시쯤 X바에 전화를 걸었다. “광고를 보고 전화했다”며 무슨 일을 하는지, 월급은 얼마인지 물었다. 30대 정도로 짐작되는 여성이 “길게 설명하기 곤란하니까 직접 와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찾아간 X바는 지하철 이태원역에서 가까워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바 입구에 ‘외국인 전용, 19세 미만 출입금지’라고 적힌 빨간색 표지가 붙어있었다.

X바는 규모가 작고 내부가 원목으로 꾸며져 편안한 분위기였다. 카운터 왼쪽으로 설치된 C자형 바텐에 의자 10개가 놓여 있고 다양한 양주와 맥주가 구비되어 있었다. 매장 한가운데에는 당구대가, 바텐 맞은편에 테이블 5개와 소파가 놓여있다. 잠시 매장을 둘러보는 사이 꽉 끼는 청바지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다가왔다. 나와 전화통화를 했던 매니저였다.

매니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름·나이를 물었다. 메모지를 꺼내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어느 학교에서 뭘 전공했느냐”고 했다. 나는 “올해 2월 Z여대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대학원을 가려고 준비 중”이라며 “영어회화 실력을 늘리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인터넷 광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우리 바에 오는 분들은 수준이 높아요.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영어로 할 수 있어야죠. Z여대 정도면 충분하네요. 기본급은 한 달 60만원이고 손님이 아가씨한테 술 한 잔을 사줄 때마다 돈을 버는 거예요. 철저히 성과급이죠. 예를 들어 잭콕(잭다니엘과 콜라를 섞은 칵테일)이 한 잔에 2만원이니까 10잔을 얻어먹으면 10만원은 아가씨 몫, 나머지 10만원은 가게 몫. 손님이 가벼운 터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웃으면서 거절하면 돼요. 손님한테 좋다고 달라붙는 건 뭐라고 안 할게요. 호호.” 다음날부터 당장 일하기로 약속하고 X바를 빠져 나왔다.

출근
닉네임 정하고 옷 갈아입은 후 홀(hall)로
20~30대 선배 종업원 7~8명과 나란히

다음날 오후 8시30분, X바에 출근했다. 매니저가 먼저 닉네임을 정하라고 해서 장부에 ‘써니(Sunny)’라고 적었다. 그는 카운터 맞은편에 있는 조그만 문을 가리키며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고 했다. 1평 남짓한 방에 신발·옷·메이크업 도구·헤어 드라이어가 들어차 있었다. 서둘러 스타킹을 갈아 신고 준비해간 파란색 원피스를 꺼냈다. 아버지께서 대학 졸업선물로 사주신 민소매 원피스였다.

한창 옷을 갈아입는데 까만 원피스를 입은 키 작은 여자가 들어왔다. “오늘 처음이에요? 나도 오늘 처음인데…. 잘 부탁해요.” 싱긋 웃는 그녀는 꽤 미인이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아차 싶었다. 이런 곳에서 누가 나를 알아본다면 거부감을 가질 게 뻔했다.

원피스를 갈아입고 홀(hall)에 나가자 이미 ‘아가씨’ 7~8명이 대기실인 듯 보이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도 그들 속에 섞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A는 뽀얀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튜브톱(Tube Top)을 입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B(여·33)에게 “지난밤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로 아팠다”며 울상을 지었다. “검사 결과 술을 많이 마셔 간이 상했고 끼니를 챙기지 않아 위에 염증이 났다”고 했다.

그는 올해 21살. 서울 소재 대학을 휴학하고 작년 여름 이 일을 시작했다. 얼굴에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쓰여있는 나에게 “유학 가려고 준비 중이에요?”라고 물었다. “여기 유학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냐?”고 반문하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대기실
“여기서 영어 배우는 거 기대하지 마 …
 단골 관리 잘하면 하루 수백만원도 벌어”

“나도 처음에는 영어 때문에 시작했는데 만날 하는 말만 하니까 영어가 안 늘어요. 사실 여기서 영어 배우는 거 기대하지 마세요. 외국 놈이나 한국 놈이나 남자는 남자니까, 술 취하면 만지고 더듬는 거지 무슨 대화를 나누겠어요?”

“영어도 안 느는데 왜 1년 가까이 이 일을 하느냐”고 묻자 “이미 ‘돈맛’을 봐서 못 그만둔다”며 빨간 원피스를 입은 C를 가리켰다. “저 언니 보이죠? 저기 키 크고 파마한 사람이요. 저 언니는 하룻밤에 700만원어치 판 적도 있어요. 가게랑 반반 나누는 거니까 350만원 번 거죠. 우리 가게에서 제일 지명 있어요.” A가 말한 ‘지명’이란 ‘손님들에게 알려져 있다’ ‘인기가 많다’는 뜻이었다.

23살인 C는 키가 170㎝가 훌쩍 넘고 모델처럼 몸매가 좋았다.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옆으로 찢어진 전형적인 북방계 미인이었다. 그는 쉴새 없이 문자를 보냈다. ‘지명’을 유지하려면 단골 손님 관리는 필수인 셈이다.

“아휴, 요즘 캐빈이 왜 안 오지? 3주 연속으로 오더니 돈이 떨어졌나? 하긴, 지난 금요일에 300만원 쓰고 엊그제 700만원을 썼으니까…. 아무튼 오늘 오기만 해봐! 죽었어! 400(만원) 뽑을 줄 알아.”

C가 담뱃불을 붙이며 “요즘 캐빈이 머리를 쓴다”며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이용하기만 하느냐’고 물어서 웃기지도 않는다”고 했다. C와 함께 수다를 떨던 D(여·24)는 “아~ 이 짓도 빨리 그만두고 싶다. 시집 가고 싶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첫 손님
이름 겨우 말하고 서먹하게 앉아 있자
“새로 왔냐?” 묻곤 눈길 한번 안 주고 퇴짜

오후 10시. 첫 손님이 들어왔다. 머리 숱이 얼마 없는 백인과 근육질 몸매의 흑인이었다. 매니저가 나를 불러 “다가가서 인사하고 ‘여기는 레이디바(Lady bar)이기 때문에 당신이 술을 사줘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하라”고 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고양이처럼 생긴 E(여·25)가 백인 남성 옆에 앉아있었다. 그는 E의 단골 손님이었다. 자연스럽게 흑인은 내 몫이 됐다.

“하,하이. 마이 네, 네임 이즈 써, 써니.”

9개월 남짓 어학연수를 하며 외국 물 좀 먹었기 때문에 영어는 문제없다고 생각했지만, 심장이 벌렁거리는 바람에 이름을 말하기도 힘들었다. 내 파트너인 흑인은 뭐 씹은 얼굴로 “새로 왔냐?”고 물었다. 실오라기 같은 얇은 옷 하나 겨우 걸치고 파트너에게 찰싹 달라붙은 E에 비하면 나는 수녀 같았다. 당연히 ‘초짜’ 티가 팍팍 났다. 그는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가라고 했다. 아무리 위장 취업이라지만 퇴짜를 맞고 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온 나에게 시선이 꽂혔다. 탈의실에서 만났던 신참이었다. 그는 자신을 ‘제니퍼’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27살이라고 했다. 그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남일 같지 않다”고 위로해줬다. 잠시 후 안경을 끼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인 남자가 들어와 바에 자리를 잡았다. 매니저가 이번에는 제니퍼를 향해 손짓했다. 수줍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둘은 자리를 소파로 옮겼다.

영업 노하우…
단골 오자 계속 옷 갈아입고 술 권해
“15분에 한 잔은 사달라고 졸라야 해”

제니퍼 일행이 자리를 옮긴 지 한 시간 정도 흘러 B(여·33)가 나한테 불만을 터뜨렸다. “쟤는 뭣도 모르면서 소파에 앉으면 어떻게 해. 맥주 한 병 시켜 놓고 계속 있는 거야?” 옆에 있던 F(여·30)가 B를 타이르며 말했다. “언니는 처음 일할 때 생각 안나? 그때는 왜 그렇게 술 사달라고 하기가 쑥스러웠는지…. 나는 첫 출근 때는 누가 만질까봐 겁나서 턱까지 올라오는 홀터넥 입고 출근했어. 하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F는 “술은 무조건 15분에 한 잔씩 빼야 한다”고 조언했다. 15분에 한 잔씩 “술을 사달라”고 조르라는 것이다. 또 “바에서는 맥주나 잭콕 같은 2만원짜리 술 시켜도 되지만 소파에 앉으면 무조건 코냑이나 와인을 시키라”고 했다. 코냑과 와인은 한 잔에 4만원이었다. 와인 1병은 60만원부터 비싼 건 100만원도 넘었다.

결국 신참인 제니퍼는 1시간30분 동안 2만원짜리 맥주 한 병밖에 팔지 못했다. 수입은 겨우 1만원. 그래도 퇴짜맞은 나보다는 실적이 좋았다.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고 묻자 한숨부터 쉬었다.

“저 남자, 영어학원 선생님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 중’이라니까 ‘영어를 가르쳐 준다’고 했어요. 한 십분 가르쳐줬나? 갑자기 어깨를 감싸더니 귓속말로 ‘팁을 줄 테니 키스해달라’는 거예요. 참 나.” 제니퍼는 “면접 볼 때 매니저가 말했던 것과 너무 다르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지가 반짝거렸다. 커플링이 틀림없었다.

“남자친구가 여기서 일하는 것 아느냐”고 묻자 “당연히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모 방송국 연출부에서 근무하던 제니퍼는 지난달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남보다 늦은 나이에 떠나는 유학이라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랭귀지 스쿨(Language School)을 다니지 않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영어학원부터 등록하고 하루도 빠짐 없이 나갔지만 회화 실력은 욕심처럼 늘지 않았단다. 그는 “고민 끝에 찾아온 게 이곳 외국인 전용바”라며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계속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니퍼와 넋두리를 하는 사이 얼굴에 털이 덥수룩하고 안경을 낀 남자가 들어왔다. 포켓볼을 치던 C(여·23)가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그가 바로 C가 애타게 찾던 ‘700만원의 사나이’ 캐빈이었다. C는 캐빈의 무릎에 앉아서 키스도 하고 술도 마셨다. 이날 밤 C는 옷을 세 번 갈아입었다. 하늘하늘한 빨간색 시폰 원피스, 몸매가 드러나는 하얀 스커트, 란제리인 듯 보이는 까만색 옷. 다른 아가씨들이 “왜 자꾸 옷을 갈아입느냐”고 묻자 “캐빈을 만족시켜야 돈을 많이 뜯을 수 있다”며 윙크 하고 나서 캐빈에게 돌아갔다.

그녀들의 얘기
“처음엔 당황스럽지만 돈 벌고 영어도 하고
 치근덕대면 눈 한번 질끈 감고 참지 뭐”

자정이 넘어서자 졸음이 밀려왔다. 게다가 아가씨 8명이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대는 탓에 눈이 침침했다. 때마침 배가 볼록 나온 외국인 한 명이 들어왔다. 매니저가 어서 가보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온 그는 무아지경 상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서 주변을 서성거리자, 그가 “헤이 베이비~ 컴온, 컴온” 하면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그를 겨우 진정시키고 통성명을 한 후 “술을 한 잔 사줘야만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맥주 한 병을 시켜 주면서 “나는 술을 산 게 아니라 너를 산 것”이라고 말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느끼한 미소와 함께. 그는 이따금 나의 허리를 감싸거나 손을 잡으면서 춤을 출 것을 강요했다. 꼿꼿이 서있는 나를 보며 매니저가 “춤 추지 않고 뭐하냐”고 눈총을 줬다. 잠시 후 내 파트너는 “덧니가 매력적”이라며 나에게 기습 키스를 시도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했지만 그를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담당 손님이 없는 G(여·26)가 혼자 영문잡지 타임(Time)을 읽고 있었다. 그는 서울 모대학 경제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써니, 너무 놀라지 마요. 처음엔 다 그래요. 나도 처음 며칠은 ‘이 일을 계속 할까 말까’ 얼마나 고민했다고…. 그래도 술 몇 잔 마셔주는 대가로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 괜찮은 아르바이트 아닌가? 뭐 그 자식들이 몸 더듬고 키스하려고 하면 눈 질끈 감고 해주면 되는 거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외국인 전용바
법상 ‘일반음식점’이므로 접대부 고용은 불법
구청은 실태나 아는지… 단속·적발한 적 없어
'외국인 전용' 표지를 내건 X바 입구. photo 조영회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식품위생법상 ‘외국인 전용바’라는 업종은 없다. 외국인 손님만 상대하는 ‘바(BAR)’를 일반 바와 차별화하기 위해 부르는 이름이다. 유흥주점에서는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유흥을 돋우는 유흥접객원(접대부)을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바는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들을 고용할 수 없다. 때문에 이태원 일대의 ‘외국인 전용바’에서 접대부를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다.

용산구청 보건위생과 관계자는 “외국인 전용바는 구청에 허가 받는 유흥주점이 아니기 때문에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기자가 “외국인 전용바에서 접대부를 고용하고 있다”고 하자 “우리 구청 보건위생과 감시팀이 용산구 일대에서 매일 밤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단속에 나서지만 외국인 전용바와 관련한 적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버젓이 불법영업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담당자들조차 실태를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 아르바이트 채용 사이트에서 ‘외국인 전용바’를 검색하자 현재 10개 업체가 채용에 나섰고, 모두 이태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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