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막차는 오전 1시 끊긴다. 첫차는 오전 5시 30분 출발한다. 그 4시간30분 동안에도 지하철은 깨어 숨 쉬고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곤히 잠에 빠져있는 시간에도 밝은 새벽을 맞을 준비가 지하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장을 나흘 연속 야간 취재했다.
◆역(驛) - 오전 1시부터 2시
"아저씨, 일어나세요. 종점입니다."
공익근무요원이 좌석에 앉아있는 50대 사내를 흔들었다. 오전 1시 서울도시철도 5호선 종점 상일동역. 사내는 전차 안에 남은 마지막 승객이었다. 공익근무요원의 재촉에 간신히 눈 뜬 사내가 웅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공익근무요원이 부축했지만, 사내는 공익근무요원의 팔을 뿌리치고 열차에서 내렸다. 승강장에 내려서도 사내는 계속 갈지자로 걸었다. 역무원은 불안한 듯 계단을 오르는 사내의 뒤를 따랐다. 사내는 머리를 흔들며 역사(驛舍)를 빠져나갔다. 그는 이날 이 역의 마지막 승객이었다.
막차에서 역무원이 깨운 취객은 4명. 공익근무요원 홍종민(24)씨는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업어서 옮겨야 될 정도의 취객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평소 하루 2~3명 정도를 업어서 역무실로 옮긴다고 한다. 취객은 주말에 5~6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연말에는 인사불성이 된 취객이 10명 가까이 되는 날도 있다고 한다.
한 역무원은 자기가 만난 가장 황당한 승객으로 새벽 1시 넘어 매표소에 나타난 50대 남자를 들었다. "꼭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야 하니 전동차를 한 대만 보내달라." 이 황당한 요구를 한 승객이 30분을 달래도 말을 듣지 않자 역무원이 "차라리 택시비를 드릴 테니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다. 이 남성은 "나는 무조건 지하철을 탄다"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결국 역무원은 그를 경찰에 넘겨야 했다.
취객을 겁내는 것은 기관사들도 마찬가지다. 취객은 무슨 일을 할지 몰라 겁이 난다는 것이다. 한 기관사는 "전동차를 몰고 들어가다가 선로 쪽에 바짝 붙어 휘청거리는 취객을 보면 실족하거나 자살 시도를 할까봐 머리털이 바짝 곤두선다"며 "요즘은 스크린도어(안전문)가 늘어나 많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막차가 떠나고 셔터가 닫히면 역 앞은 택시 천국으로 변한다. 오전 1시 성수역 앞에는 택시 승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택시 기사들은 "천호동" "분당" "강남" 등 행선지를 외치며 손님을 골라 받았다. 택시를 기다리던 30대 남성은 "지하철을 타고 최대한 집 가까운 곳에 와서 택시를 탄다"며 "막차가 끊기면 택시가 사람 골라 태우는 상황을 다들 알면서 왜 이렇게 놔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택시를 탈 정신마저 없는 승객은 역무원들의 몫이다. 이런 일을 자주 겪은 역무원들은 인사불성이 된 취객을 집에 보내는 노하우까지 얻었다. 취객이 들어오면 일단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단축번호 1번부터 5번까지를 차례로 눌러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월요일 밤이었기 때문인지 지난 1일은 술 취한 사람들이 적었다. 하지만 역무원들은 곧장 역 안 순찰에 나섰다. 정수복(39) 부역장은 "승객이 다 나간 것 같아도 역사 안쪽을 꼼꼼히 순찰해봐야 한다"며 "순찰을 돌다보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갈 곳'에서 발견되는 승객들이 있다"고 말했다. 차량에서 멀쩡히 내린 사람이 화장실 변기 위에 잠들어 있기도 하고, 나갔다고 생각한 사람이 역사 안쪽 벽에 기대 단꿈을 꾸고 있기도 하다. 이날은 '숨바꼭질'에 걸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승객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하면 역무실은 마감에 들어간다. 역사 안의 설비가 모두 정상 작동하는지를 확인하고, 판매한 승차권과 금액이 일치하는지도 확인했다. 예전에는 이 작업이 한 시간 넘게 걸렸지만, 카드 사용 비중이 높아진 지금은 30분 만에 끝난다.
마감을 마친 역은 청소에 들어간다. 5호선 강동구간에서는 강동역과 상일동역이 물청소를 시작했다. 역이 넓어도, 청소는 2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역의 셔터를 여는 시간은 오전 5시지만, 지하에 있는 대합실 바닥을 말리기 위해서는 1시간 이상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 1호선 시청역에선 역무원이 노숙자 순찰에 나섰다. 시청역은 막차가 끝나도 셔터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계속 점검하지 않으면 노숙자 쉼터가 돼버리고 만다. 올 2월에는 술에 취한 노숙자가 역 안의 대형 TV를 부숴버린 일도 있었다. 박승순(49) 부역장은 "역 안에서 자는 노숙자는 많지 않지만, 술에 취한 노숙자가 야간 청소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차량기지 - 오전 1시30분부터 3시
종착역을 출발한 5호선 막차는 서울 하일동 고덕차량기지로 향했다. 이동진(39) 기관사는 "막차는 다른 열차보다 훨씬 긴장된다"며 "도착 시각도 정확히 맞춰야 하고, 취객이 많아 출입문에도 신경을 더 써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열차와 달리 막차는 모든 승객들이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시에 도착하지 않으면 상황실로 항의가 빗발친다.
열차가 차량기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이 기관사의 일은 끝났다. 하지만 그는 퇴근하지 않았다. 막차를 운전한 기관사는 오전 4시까지 기관사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음 날 첫차를 운행해야 한다. 기관사는 3조 2교대로 일하는데, 오후 6시에 출근한 야근 기관사는 오전 9시까지 열차를 운전한다.
차량 검사고(檢査庫) 안은 낮을 방불케 할 만큼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조명은 천장뿐 아니라 아래쪽에도 있었다. 선로 아래쪽에도 조명이 붙어있어 열차 아래쪽을 비추고 있었다. 기관사가 열차에서 내리고, 열차가 차량기지에 들어온 이후의 일은 정비 직원들의 몫이다. 기관사로부터 차량 이상 여부를 확인하고 운행 기록을 넘겨받은 후 점검에 들어간다.
오전 1시에 5호선 종착역을 출발해 15분 후에 검사고에 입고된 막차 5223호 열차는 '3일 검사' 대상이었다. 차량 검사는 주기에 따라 도착, 3일, 3개월, 3년, 6년 검사 등으로 구분된다. '3일 검사'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도착 검사는 30~40분 동안 같은 항목을 가볍게 검사한다. 검사고에서 야간에 행해지는 검사는 이 2가지. 3개월 검사부터는 며칠씩 걸리기 때문에 낮에 실시한다.
열차가 검사고에 정차하자마자 정비 직원 2명이 운전실에 올라 계기판 점검을 시작했다. 먼저 들어온 옆 열차에선 또 다른 정비 직원 2명이 차량 아래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10여 분 동안 열차 앞의 신호가 들어오고 꺼지고, 문이 열리고 닫혔다. 다른 직원 한 명이 바깥에서 신호를 확인한 후, 차량에 올라 문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살폈다.
계기판 점검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옆 차량을 점검하고있던 직원 2명이 차량 아래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도시철도공사 경정비팀 김용익(50) 차장은 "야간에 검사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살피는 것은 제동장치"라며 "달리지 못하는 차도 문제지만, 제대로 멈추지 못하는 차는 인명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비 직원들은 차량 끝에서 끝으로 움직이며 바퀴와 축, 동력전달장치를 검사했다. 오전 1시 15분에 시작한 검사는 오전 3시가 돼서야 끝났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점검이 지루하지는 않을까. 황덕원(51) 검사과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열차가 다 똑같아 보여도 정비하는 입장에서는 다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며 "전동차 대부분이 10년 정도 됐기 때문에 밤에 고쳐놓은 문제가 아침에 또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터널 - 오전 2시부터 4시
오전 1시30분, 차량 기지의 전력 공급선 위에 있는 표시등이 '급전(級電)'에서 '단전(斷電)'으로 바뀌었다. 열차에 전원을 공급하는 전력 공급선의 전기가 차단된 것이다. 전력 공급선의 전원은 1시30분부터 4시까지 3시간30분 동안 차단된다. 전원 차단과 동시에 지하 곳곳에서 작업이 시작됐다. 전력이 공급되는 동안에는 누전 위험으로 할 수 없는 정비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오전 2시 5호선 천호역-강동역 구간에선 고압 살수차가 터널 천장에서 바닥까지 전면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살수차가 지나간 터널 안에는 물안개가 피었다. 살수차는 사람이 걷는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며 터널 속에 가득한 먼지를 바닥으로 내려 앉히고 있었다. 뒤따라 오는 차가 바닥에 흐르는 오수(汚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고압 살수차로 터널 청소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초. 이전까지는 모두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천장까지는 물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선길(52) 장비팀장은 "고압 살수차가 도입돼 일이 많이 간단해졌지만 터널 청소는 여전히 손이 많이 간다"며 "살수차가 지나간다고 다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어서 청소가 끝난 후에도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룻밤에 10㎞ 정도씩 터널을 청소한다.
오전 2시30분 고압 살수차가 지나간 반대편 선로에서 전력 공급선 보수 차량이 나타났다. '모터카'라고 불리는 정비 차량에 탄 정비팀원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차량에 다가가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량에서 나온 디젤 매연이 터널 속 먼지와 합쳐져 터널 안이 뿌옇게 보일 지경이었다.
전력 공급선을 점검하는 차량은 자주 멈췄다. 차량이 멈추는 곳은 지그재그로 배치된 전력 공급선이 만나는 구간. 차량이 멈춰 설 때마다 정비팀원들은 계측기를 들고 전력 공급선을 점검했다. 이들이 점검하는 것은 전력 공급선의 간격과 두께. 전력 공급선이 전동차와 정확하게 접촉이 되지 않으면 전기가 통하지 않아 멈추게 된다.
점검팀의 이용교(41) 주임은 "전력 공급선 정비는 문제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달 들어 대구에서 발생한 전동차 고장 사고도 전력 공급선에 문제가 생겨 일어난 일"이라며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매일 똑같이 열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정비 작업은 오전 4시까지 이어졌다.
◆차량기지, 역 - 오전 4시부터 5시30분
1시간 동안의 짧은 정적이 끝나고 차량기지에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첫차로 나서는 차량에 도착한 정비 직원들은 또다시 어제와 같은 검사를 반복했다. 운전실에 들어가 각 계기판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문이 정상적으로 열리고 닫히는지를 살펴봤다. 차축과 바퀴를 살피고, 전자 설비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오전 4시30분 전동차에 오른 기관사가 다시 한 번 검사를 진행했다. 내용은 정비 직원들이 운전실에 들어와서 한 것과 똑같았다. 모두가 똑같은 검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직원들은 고집스레 검사를 반복했다. 불을 켜고 끄고, 문을 열고 닫았다.
같은 시간 역에서는 셔터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물청소한 대합실 바닥에 물이 고인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각 시설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역무원이 매표기에 표와 잔돈을 채워 넣었다. 오전 5시 공익근무요원이 셔터를 열었다.
오전 5시5분 고덕차량기지의 선로에 녹색등이 켜졌다. 첫차가 차량기지를 나섰다. 열차 상태를 점검하듯 천천히 움직이던 열차는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열차는 5시19분에 상일동역을 지나쳐 강동역으로 향했다. 이 열차는 강동역의 첫차였기 때문이다. 2~3분 간격으로 열차가 상일동역을 지나쳤다. 5시30분 상일동역에 첫차가 멈췄다. 4월 2일 아침 첫차에 승객들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