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괴한에게 납치될 뻔한 일산 초등학생 A양(10)을 구한 건 아파트 1층에 사는 여대생 B(19)양이었다. 또 범인이 찍힌 CCTV 화면을 복사해 경찰에 넘긴 사람은 초등학생의 부모였다. CCTV 화면의 범인 모습을 프린트해서 아파트 단지 게시판에 붙인 것도 경찰이 아니라, 초등학생의 부모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경찰에 대해 31일 "일선 경찰이 너무 해이해져 있다"며 "여러분같이 이렇게 하면 어린 자녀를 가진 국민이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느냐"고 질책했다. 경찰은 수사 착수까지는 71시간 이상 걸렸지만 이 대통령의 질책이 있은 뒤 4시간 30분 만에 용의자를 검거했다.

◆서울 대치동에서 용의자 붙잡아

이명박 대통령까지 31일 일산경찰서를 방문해 경찰을 질타하자, 경찰은 뒤늦게 부산을 떨었다. 경찰은 이날 수사본부장을 이기태 일산서장(총경)에서 박학근 경기경찰청 2부장(경무관)으로 격상시키고, 신고포상금도 5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올렸다.

이날 오후 지하철 3호선 대화역 승강장에 설치된 CCTV에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이 찍힌 사실을 확인했다. A양 아파트 CCTV에 찍힌 용의자와 같은, 황토색 바지에 짙은 청색 점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인물은 A양 납치 미수 사건 직후인 26일 오후 4시16분 대화역 개찰구를 통과해 4시26분 수서행 지하철에 탑승해 수서역에서 하차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경찰이 용의자 이모(41)씨를 붙잡은 것은 31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대치동의 한 사우나 앞에서였다. 경찰은 "범행 당시 이씨는 '술에 취해 전철을 탄 뒤 대화동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를 걷던 중 A양을 발견하고 뒤따라가서 때렸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이날 오후 11시쯤 일산경찰서에 이송돼 왔다. "왜 그랬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기분이 나빴는데 걔(A양)가 째려봐서 혼내주려고 했는데 소리를 지르니까 그랬다"고 대답했다.

이씨는 이후 경찰조사에서 "성폭행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이씨를 폭행 및 성폭행 미수혐의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 대신 부모가 뛰었다

이 대통령 한마디가 있자, 당일 밤 용의자를 체포한 경찰이지만, 사건 착수까지는 3일이나 걸렸다.

26일 오후 3시 34분쯤 A양 납치 미수 사건이 발생한 직후, A양 부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15분쯤 뒤 일산경찰서 대화지구대 경찰관 2명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들은 A양의 부모와, 1층에 사는 대학생 B양을 만나 사건 개요를 들었다. 범인이 A양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흉기로 위협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도 봤고, 문제의 엘리베이터 내부의 버튼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런 뒤 범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긴 CCTV 화면은 확보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대화지구대는 이튿날인 27일 이 사건을 '어린이 납치 미수'가 아니라 '단순 폭행'으로 일산경찰서에 보고했다. 보고 내용엔 범인이 흉기를 갖고 있었다는 내용도 빠져 있었다.

경찰이 늑장을 부리자, A양의 부모가 나섰다. 이들은 사건 발생 다음날(27일) 오전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CCTV 화면을 복사했다. 여기에 나온 용의자 모습을 프린트해서 전단지 100여장을 만들었다. A양 부모는 아파트 단지 내 각 동 1층 안내판과 근처 아파트 단지를 직접 돌면서 이 전단지를 붙였다.

A양 부모가 이날 복사한 화면에 A양이 폭행당하는 장면이 없자, 28일 다시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범행 장면이 찍힌 CCTV 화면 전체를 복사했다. 일산경찰서 담당 형사들은 29일에야 A양 부모를 찾아왔다. 그때 A양 부모는 복사해둔 CCTV 화면을 넘겨주었다.

수사에는 늑장이던 경찰은 문책에는 재빨랐다. 경찰청은 이날 오후 일산경찰서 형사과장과 대화지구대장 등 6명을 직위해제하는 중징계에 처했고, 김도식 경기지방경찰청장과 이기태 일산서장에 대해서는 서면경고했다.